눈을 감고 기억의 창고로 들어가면 그 곳에는 수 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뒤섞여있다.어떤 기억은 기쁨으로 즐겁지만 대부분 회한으로 몸서리 치게 한다.사고로 다리가 부러져서 깁스를 하고 지내던 일, 헤엄치는 것을 배우다가 물을 잔뜩 먹고는 수영 배우길 포기한 일, 고등학교 미술부 활동 때 주말마다 선배에게 매맞던 일, 시위하다 잡혀 들어간 구치소에서 6·29 선언 들으면서 감격하던 일 등이 떠오른다.
1991년 첫번째 판화개인전을 열 때다.
그 시절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한 직후로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재중동포들이 서울역에서 우황청심환이나 조잡한 잡화를 판매하고 있었다.
그 무리에 묻혀 함께 온 일행 중에 판화가들도 있었다. 흑룡강성의 황태화 선생과 장춘에서 오신 이수산 선생이다.
나는 중국의 신흥목각화운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시장으로 찾아 온 그들을 반갑게 맞이 하였다.
그때 그들로 하여금 장서표(藏書票)라는 작은 판화에 대해 소개를 받고 매우 흥분했다.
장서표란 책의 소장자를 표시하는 아주 작은 판화인데 유럽에선 EX-LIBRIS 라고 표기한다. 나는 당시 전교조 사업단의 문화상품에 들어가는 판화를 제작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미술의 대중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장서표야 말로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매체였다. 사실 그 때 나는 첫 개인전이 마지막 개인전이 될지도 모른다는 심한 자책에 빠져 있었다. 이미 작업에 대해서 의욕을 잃고 있었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서표를 작업하면서 새로운 창작욕구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작업을 하면서 다른 분야의 많은 지인이 생겼고 그들의 내면세계를 접하면서 많은 지혜의 양분을 섭취했다.
그 후 장서표를 국내에 보급하고 알리는 일을 하면서 절망의 시기를 극복하였던 것 같다. 수 차례 장서표 전시를 기획했고 장서표만을 가지고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 때 장서표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은 살면서 많은 사건을 접한다. 한 개인에게 있어 역사적, 사회적 조건은 그의 삶을 규정한다. 특히 어떤 사람과 사물을 어느 시기에 만나는 가에도 많은 개연을 담보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들과 장서표를 잔잔하게 만났지만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남궁 산 (판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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