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1월3일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들과 광주고보의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지면서 그 해 연말까지 전국으로 번져나갈 광주학생운동이 점화됐다.사태의 발단은 그 해 10월30일 광주와 나주 사이의 통학 열차에서 일본인 남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데 있었다.
여기서 비롯된 두 학교 학생들의 편싸움을 일본어 신문 ‘광주일보’가편파적으로 보도하고 경찰 역시 일방적으로 일본 학생들을 편들자, 조선 학생들 사이에서 곧 ‘조선독립만세’의외침이 터져나오며 운동은 삽시간에 전 호남지역으로 퍼졌다.
광주학생운동은 신간회를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가 힘을 실으면서 3ㆍ1운동 이후최대의 민족해방운동으로 치솟았다.
12월2일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서울의 각급 학교와 시내 곳곳에 조선 민중과 학생이 총궐기해 광주 학생들을 지원하자는격문이 뿌려졌고, 이에 호응해서 조선인 학생들 다수가 가두시위와 동맹휴학에 나섰다.
운동은 이내 전국으로 번져 신의주ㆍ회령에서 부산ㆍ대구에 이르기까지 조선반도 전체에서 학생들이 떨쳐 일어났다.
이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194개교의 5만4,000여명에 이르렀는데, 이 가운데 580여명이 퇴학처분과 함께 최고 5년의 징역형을 받았고, 2,330여명이 무기 정학 처분을 받았다.
광주학생 운동이 곧바로 민족해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이 운동은 3ㆍ1운동으로시동을 건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대미를 장식하며 언젠가 얻고야 말 독립의 소중함을 민족구성원 대다수의 마음 속에 각인시켰다.
무엇보다 그때의 광주는 고립되지 않았다. 그 점에서 1929년 11월의 광주는 1980년 5월의 광주와는 달랐다. 5월 광주에 전국의 민주주의 세력이 연대했다면,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꽤 달라졌을 것이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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