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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문화어사전 / 망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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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문화어사전 / 망가지다

입력
2001.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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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물건이 찌그러지거나 부서져 못쓰게 되다■새 정의: (사람이)단정하지 못하거나 허점을 드러내 보이다. (상태가)심각하게 나빠지다

■용례: “오늘 밤, 이 술로 망가져!” “몸매가 많이 망가져서속상해.”

‘고장나다’와 ‘망가지다’는 비슷한 의미지만 잘못된 것의 정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고장나는 것이 부분의 기능 이상이라면 망가지는 것은 회복 불가능한 총체적 이상의 의미가 강하다. 사전의 정의도 마찬가지다.

고장나는 것은 ‘기계나 설비 따위의 기능에 이상이 생기는 일’이지만 망가지는 것은‘물건이 쓰지 못할 정도의 상태가 됐음’을 말한다.

“고장난 냄비 고쳐요”라는 고물장수의 외침은 들은 적이 있지만, “망가진 전자제품 고쳐요”라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형태를 가진 물건을 대상으로 하지 않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망가지다’가 사람에게 적용되면 조금 더 확대된 의미를 갖는다. 물론 회복 불가능의 뜻은 아니다.

대학원생 서모(28)씨는 자신의 몸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몸매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끔찍하다.

요즘 유행하는 달리기 붐에 동참하고 매일 에어로빅 학원을 찾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씩 그에게 찾아오는 폭식의 순간이면 실망의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요즘 몸매가 다시 망가지기 시작했어.”

연예인들은 TV 프로그램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말로 웃음을 자아낸다. “오늘 저 여기서 망가지겠어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취객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 밤은 이 술과 함께 망가지자.”

문화평론가 정우성(31)씨는 “망가지다에는 ‘-지다’라는 피동의 어미가 붙지만 엄연히 주체의 의지가 개입되는 단어”라며 “스스로 자초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때로는 스스로 웃음의 대상을 자처하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과 분노에 자신이 내동댕이쳐지는 상황이 된다.

역시 ‘망가지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망가지는 대상이 너무 넓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10대도 망가지고, 국토도 망가지고 있다. 한 소설가는 “인생은 조금씩 망가져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피할 수 없는 진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망가짐의 속도가 빨라지고 깊이가 깊어지는 것이 우리 사회의 어떤 측면을 반영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우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시간이 됐다.

더 이상 망가져서는 안 될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정상원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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