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오늘속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오늘속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입력
2001.11.02 00:00
0 0

1755년 11월2일 프랑스 루이16세의 비(妃)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1793년 몰(歿).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고,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1세다.그녀는 빈의 황궁에서 태어났지만, 38년 뒤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죽었다.

왕족끼리의 정략 결혼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으므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14세에 프랑스 루이 왕세자와 결혼해 18세에 프랑스의 왕비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왕비로서의 그녀의 처신이었다.

그녀의 낭비벽과 성적 방종과 군주제적 완고함은 유럽의 왕가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것이었다.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성적으로도 무능했던 남편을 제쳐놓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살던 베르사유궁의 트리아농관으로 수많은 애인을 불러들였다.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그녀의 전기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의 주장에 따르면, 그녀가 낳은 자식들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그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고 한다.

루이16세가 무능하되 검소했던 데 비해, 왕비의 낭비벽은 프랑스의 재정을 흔들거리게 할 정도였다. 백성이 빵을 요구하며 혁명을 일으켰다는 얘기를 듣고 빵 대신브리오슈 과자를 먹게 하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그녀의 현실 감각이 얼마나 둔했는지를 알려준다. 그녀의 완고함이 아니었다면, 혁명 이후 루이16세는공화파에게 더 많이 양보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적어도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마리 앙투아네트의죽음은 참혹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녀가 형편없는 여자였다는 사실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명성황후 민씨의 죽음은 그보다 훨씬 더 참혹했지만,그것이 민씨를 좋게 볼 이유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종석

/편집위원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