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4일 프리처드 한반도평화회담 특사는 북한이 대미관계를 진정으로 개선코자 한다면 반테러전쟁을 수행하는 미국에 행동으로 협력하라고 촉구했다.중동ㆍ아프리카의 테러지원국과 거래했던 내용과 관련 군사정보를 넘기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부시 정부는 북한의 대량파괴무기 문제에 대해 클린턴 정부와는 대조적 방법으로 접근한다면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경수로 건설은 중단될 것이며, 미사일 협상에서는 검증문제부터 논의되어야 하고,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 배치 문제도 협상테이블에 올려야 한다고 명백히 말했다.
정치적 현실주의를 주창한 한스 모겐소는 역지사지(易地思之)야말로 성공적인 외교의 비결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프리처드의 발언으로 요약되는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은 성공할 수 있을까?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프리처드의 발언은 황당한 것이다.
북한은 북미기본합의문에 따라 '만족할만한' 수준에서 핵을 동결해왔지만, 제공받기로 되어있는 경수로는 기본합의문이 채택된 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95% 정도의 부지정리 공사 밖에 진행되지 않았다.
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북한은 이미 클린턴 정부 때 300 마일 이상의 사거리를 가진 탄도미사일의 생산ㆍ시험ㆍ배치 뿐 아니라, 미사일 및 부품ㆍ기술의 수출 또한 중단하겠다고 제의한 바 있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발표한 미국과의 공동성명에서 "테러를 반대하는 국제적 노력을 지지 고무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김정일 위원장이 '회의적인 북한의 군부'를 회유하기 위해 조명록 차수를 미국에 파견했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은 대미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위험스러울 정도'로 노력하고 있었는데 부시 정부가 일방적으로 대화를 중단했고, 자기의 필요에 따라 이제 재개하겠다고 하면서 의제를 일방적으로 정해놓고 응하라고 하는 꼴이다.
더구나, 자신을 테러지원국으로 낙인찍고 있으면서 반테러 전쟁에 협력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모순의 극치이다.
부시 정부는 재래식 무력 문제를 포함한 무조건적 협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역으로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의제에 포함시키고 이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협상하자고 한다면 미국은 이에 응할 것인가? 부시 정부가 북미합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당장의 필요에 따라 합의 일부만을 강조하는 것은 북한을 진지한 협상상대로 간주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준다.
미국이 협상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이 미국에게 때로는 불량국가였다가 때로는 협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파트너로 비쳐지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는 부시 정부의 대외정책이 상황에 따라 극히 자의적으로 구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철학과 원칙없는 초강국의 독단주의가 초래한 단면이다.
그러나 원칙과 철학없는 대외정책은 무고한 미국 시민들을 불행한 사태의 피해자로 만들며 미국의 지위와 위신을 추락시키고 결국은 자신들이 그토록 의지하는 힘마저 약화시키고 있다.
부시 정부는 북미 서로가 위협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 '상호위협감축'의 개념에 입각하여 페리 프로세스로 재진입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이익을 제고하는 길이다. 비즈니스맨 출신인 부시 대통령은 결국 위험부담이 큰 비즈니스를 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동맹국으로서 미사일 방어, 대북 전력지원 문제, 반테러전쟁 등과 관련하여 미국을 일관성있게 추종한 한국 정부는 이제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에서 배워야 한다.
남북 문제에 미국이 협력할 차례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부시 대통령의 '상호주의' 정신이 작동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박건영교수 가톨릭대국제학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