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4년이 흘렀다. 환란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던 1997년 11월은 한국경제 역사상 가장 길고도, 끔찍한 사건이었다.당시 국민들의 시선은 한달 여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에 온통 쏠려 있었다.
기아사태의 후유증으로 금융시장은 붕괴 직전이었고, 태국 인도네시아를 차례로 무너뜨린 외환위기 태풍이 홍콩을 거쳐 한반도로 북동진(北東進)중이었지만 대부분 '설마 별 일이야 있겠어'라며 흘려 보냈다.
경제 최고책임자(강경식·姜慶植 부총리)는 "한국경제의 펀더맨털은 동남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입이 닳도록 얘기했다.
하지만 10월말부터 이미 좌초는 시작되고 있었다. 주식시장에서 달러가 빠져나갔고 해외 금융기관은 국내 은행과 종금사에 대한 무차별 여신회수에 들어갔다.
폭등하는 환율을 붙잡기 위해 한국은행은 보유외환을 집중 살포했고 재정경제원 외환라인은 금융기관마다 전화를 걸어 "달러를 팔지 말라"고 협박도 하고 사정도 했다.
침몰하는 함선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내는 격이었다. 외환은 바닥상태였고 기댈 곳은 국제통화기금(IMF)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가 IMF 구제금융신청을 공식 발표한 것은 11월21일.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부는 IMF행을 주저했다. 강부 총리는 재경원과 한국은행으로부터 자력해결이 어렵다는 건의를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불구, "금융개혁안(한은법 개정)이 통과되면 해결할 수 있다"는 '이상한 소신'을 밝히고 있었다.
결국 12월3일 치욕적 'IMF 신탁통치서명'에 사인을 했다.
미 클린턴 행정부가 경제논리 아닌 안보차원에서 한국지원을 결정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우리나라가 '국가부도(모라토리엄)'직전의 위기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이후 상황은 다소 호전되었고 고생 끝에 'IMF모범국'으로 격찬을 받으며 조기졸업장을 따냈지만, 환란을 불러왔던 '단기압축성장'의 후유증 못지않게 '단기압축개혁'의 진통이 계속되고 있다.
IMF 체제의 핵심 처방전으로 많은 사람들을 거리고 몰아냈던 '구조조정'이란 용어 자체로도 피로감을 느낄 정도다.
게다가 대우차, 하이닉스반도체 등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경제문제가 산적해 있다. 세계적 경기후퇴에 이은 9·11 테러사건의 후유증도 우리 경제를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더욱이 이번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르헨티나 발 외환위기가 심상치 않아보인다.
재정경제부 당국자는 "아르헨티나 외환위기는 우리 경제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하지만 1997년을 돌이켜보면 그 말도 ?굼? 수 없다. '계곡의 빗물'처럼 보이지만 얼마나 '큰 강'이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할 정치건은 그대나 지금이나 정쟁으로 날밤을 새고있고 정국은 얼마 있지 않아 여야의 대통령 선거전으로 돌입할 것이다.
이로인해 우리 경제가 또 얼마나 큰 타격을 받을 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성철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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