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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단군 할아버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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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단군 할아버지'는 없다

입력
2001.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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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21' 11월호를 읽다가 '단군릉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특집과 맞닥뜨리고 마음이 스산해졌다.이 특집 기사들은 지난 1994년 개천절을 앞두고 개건됐다는 평양시 강동군의 단군릉을 다뤘다.

거기 누워있는 사람이 단군이라는 단정은 기사 어디에도 없지만 '민족 21'의 이 특집은, 강한 민족주의와 통일 염원에 이끌리는 잡지의 기사답게, 그 무덤의 주인이 실제로 단군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특집의 한 기사는 1930년대 초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하며, 단군묘로 알려진 강동의 무덤에 조선조 말엽까지 조정 차원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평양시 강동군의 무덤에 묻혀있는 사람이 단군일 가능성을 아예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그 문제를 두고 내기가 벌어진다면 나는 아니라는 쪽에 걸겠다.

합리적인 도박꾼이라면 누구나, 수천년 전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놓고 내기가 벌어졌을 때, 특정한 한 사람보다는 그 이외의 모든 사람쪽에 돈을 거는 것이 승산이 높다고 판단할 것이다.

특집의 기사가 인용하고 있는 북한 지도자의 말에 따르면, 1994년을 기준으로 그 무덤의 뼈는 5011년 전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내기가 실제로 벌어지더라도 승자와 패자는 가려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민족21'의 기사대로 단군이 "그(북측 안내원)와 나('민족21' 기자)의 공동의 할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그'와 '나'가 한국인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런 뜻의 '공동 할아버지'는 있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특집이 선결해야 할 문제들, 예컨대 단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개인의 이름인가 아니면 특정 시대 부족국가의 군주-제사장을 통칭하는가, 또 한국인은 무엇인가, 한국인과 한국인 아닌 사람의 경계는 어디인가, 거기서 본질적인것은 혈통인가 문화인가 국적인가 하는 문제들을 이 기사들은 도외시하고 있었다.

이 특집을 읽으며 특히 마음에 걸렸던 것은 핏줄에 대한 집착이었다.

단군이라는 '공동의 할아버지'를 접착제로 삼아 남북을 하나로 묶으려는 이 잡지 편집진의 선의는, 예컨대 몽골 사람들과 동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유전자적 닮음의 비율을 제멋대로 따져본 뒤 한국인들에게서 그 비율이 높게 나왔다며 흐뭇해 하는 어느 극우 인사의 징기스칸 예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게다가 단군이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노예제 사회의 통치자였을 뿐이다.

불과 1백여년 전까지만 해도 '일하는 물건'으로 취급되던 노비들의 후손과 그들의 노동력 위에 얹혀 살았던 지배계급의 후손에게 '공동의 할아버지'를 설정하는 것은 과학적 타당성을 떠나서 윤리적으로도 정당화하기 힘들다.

나는 내 빈약한 상상력으로 쉬이 그려볼 수 없는, 그러나 핏줄을 통해 나와 이어져 있다고 간주되는어떤 옛 조상들에게보다는, 내 궁핍한 실존이 스치고 맞닥뜨린 지구 이 편과 저 편의 동시대인들에게 더 귀속감을 느낀다.

이를테면 나는 5천년 전의 '단군 할아버지’만일 그가 내 조상이라면 5천년 뒤의 이름 모를 후손에게보다는 쌍둥이 빌딩 테러사건 뒤 한국 정부의 사찰과 악덕 사용자의 임금체불로 힘겨워하고 있는국내의 이슬람권 노동자들에게 더 연대감을 느낀다.

'민족21'의 특집이 어떤 종류의 인종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5천년 전으로까지 소급되는 핏줄의 연면에 대한 몽상이 잠재적으로나마 인종주의쪽으로 길을 터놓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렇게 역사적ㆍ사회학적 상상력이 거세된 단군 사랑조차 단군상의 목을 베는 것으로 믿음의 독실함을 뽐내고자하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의 몽매보다야 낫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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