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마치 투수와 같다. 둘다 계기가 필요하며 호흡(완급)조절은 정말 힘든 작업이다(Poets are like baseball pitchers.Both have their moments. The intervals are the tough things).'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는 시인과 투수를 같은 반열에 놓고 비교했다.
어린시절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프로스트다운 발상이다. 여기서 인터벌이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거리(시), 투구와 투구 사이의 시간(야구)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견강부회(牽强附會) 일지 모르나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 승리라는 목적을 향해 펼치는 고독한 싸움은 시인의 창작과정과 다를 바 없다.
사실 투수는 외롭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라고 하지만 뒤집어 보면 승패는 거의 전적으로 투수에 달려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선발이나 중간계투는 무너지면 대신 나서줄 투수가 있지만 승리를 지켜야 하는 마무리는 혼자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승리를 날렸을 경우 무언의 눈빛에 담긴 동료와 팬들의 비난과 원망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요즘 많은 국민의 눈은 월드시리즈 무대로 향해 있다. 우리의 김병현(22ㆍ79년생ㆍ애리조나다이아몬드백스)이 언제 등판할까, 손꼽아 기다린다.
31일 뉴욕 양키스다디움에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뉴욕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3차전이 열렸지만소속팀이 지는 상황이어서 김병현의 등판은 또다시 미뤄졌다.
김병현이 동계훈련중 연마한 업슛은 시속 90마일(약 144km)이상의 강속구.
오른쪽 타자의 몸쪽으로 떠오르는 이 결정구는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다. 홈플레이트 부근에서 변화무쌍한 바람을 일으키는 구질은 구단명칭처럼 다이아몬드백스 방울뱀을 연상시킨다.
방울뱀이 공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예측을 불허한다(다이아몬드백스 방울뱀은 애리조나주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된다. 팬들의 공모로 결정된 구단명칭에는 다이아몬드백스 방울뱀과 다이아몬드형태의 내야를 상징하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야구팬들이 김병현에 대해 갖고 있는 궁금증은 대개 3가지이다.
①한국에서 뛰었다면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둘 수 있을까 ②메이저리그에서 통하는 이유는 ③선발투수가 될 가능성은 없는가 하는 점이다.
김병현은 국내 최고의 선발투수가 됐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일치된 평가다.
지금까지 최고의 잠수함투수로 꼽히는 이강철(기아)도 전성기 때 142㎞ 정도의 구속이었는데 김병현은 150㎞대의 공을 뿌린다.
미국에서 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희소성이다. 미국에는 잠수함투수가 거의 없다. 수평스윙을 기본으로 하는 한국야구와 달리 미국 타자들은 어려서부터 어퍼스윙을 배워 김병현의 떠오르는 공에 대처하기 힘들다.
하지만 선발은 어렵다. 좌타자가 많은 메이저리그에서 선발로 나선다면 상대팀은 좌타자로만 타순을 짜 괴롭힐 것이 뻔하다.
5~6이닝을 던지다 보면 김병현의 공이 눈에 익게 되고 체력적 한계로 구속이 떨어져 난타당할 가능성이 크다. 당연히 마무리로 남는 편이 낫다.
김병현은 올 시즌 월드시리즈 무대에 진출한 최연소 선수이자 현재 메이저리거중 두번째로 키가 작은(176cm) 선수다.
그러나 나이나 키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고난 배짱(자신감)과 집중력은 그를 작은 거인으로 만들고 있다.
그의 동료이자 까마득한 선배인 랜디 존슨(38ㆍ208cm)이 미 언론으로부터 '거인(Big Unit)'으로 불리듯이 김병현이 작은 거인(LittleBig Man)으로 평가받을 날도 멀지 않다.
이기창 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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