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어가 이상해요. 그의 아내가 울고 있습니다.”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첫 날인 24일 저녁. 마지막 곡인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8번 연주가 막 시작됐을 때 안호상 예술의전당 공연사업국장은 이런 보고를 받고 머리카락이 번쩍 섰다.
지난 해 4월 연주 도중 쓰러져 사망한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가 떠올랐다. 곧 바로 앰뷸런스를 부르고 서울대 병원에 연락해 의사를 대기시켰다.
쿠르트 마주어(74)는 간신히 지휘를 마치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다음날 공연은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판단이 내려졌다.
그 때가 밤 11시. 예술의전당과 런던 필 관계자들은 긴급회의를 갖고, 마주어 수준의 정상급 지휘자를 어떻게든 찾아내 공연하자는 데 합의했다.
밤 11시 30분. 지휘자 찾기가 시작됐다.
전 세계로 수소문한 결과 자정이 넘어서야 볼프강 자발리쉬와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일본 순회공연 중이며, 테미르카노프가 25일 딱 하루 공연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후쿠오카에서 한밤중에 전화를 받은 테미르카노프는 흔쾌히 SOS에 응했다.
그런데, 그의 일본 투어를 주최한 재팬 아트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결국 어렵사리 허락이 떨어졌다. 새벽 2시였다.
이때부터 레퍼토리 협의에 들어갔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런던 필과 해봤다. 그러나슈만과 R. 슈트라우스를 하루 연습으로 연주할 수는 없다”는 테미르카노프의 입장, 공연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런던 필과 예술의전당 측 판단에 따라 결국 슈만과 슈트라우스 대신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으로 바꾸기로 결정됐다.
그 때가 새벽 3시.
그러나 산 넘어 산이었다. 당장 테미르카노프의 입국 비자가 필요했다.
리허설과 공연을 하려면 늦어도 낮 12시 전에 도착해야 하는데 후쿠오카발 서울행 첫 비행기는 오전 9시 30분.
적어도 오전 7시 전에 비자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예술의전당은 윤형규 문화부 차관과 후쿠오카 총영사관에 비상협조를 요청했다.
덕분에 초특급으로 비자가 떨어져 테미르카노프는 9시 30분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테미르카노프가도착했다. 악보와 연주복, 구두까지 모든 짐을 다음 방문지인 삿포로로 부쳐버린 뒤라 아무 것도 없는 맨몸이었다.
예술의전당은 급히 그의 몸에 맞는 옷과 구두, 지휘자용 악보를 구했다. 런던필은 마침 차이코프스키 4번 악보를 갖고 있었다.
우여곡절끝에 런던 필은 오후 3시부터 새 레퍼토리로 리허설을 하고 저녁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예고 없이 지휘자와 레퍼토리가 바뀐 데 대해 일부 항의도 있었지만, 런던 필과 협연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테미르카노프는 만족을 표시했다.
갑작스런 사정으로 지휘자가 바뀌는 일은 가끔 있다. 브루노 발터대신 등장해 스타가 된 레너드 번스타인이 대표적인 예이다.
안 국장은 “피가 마르는 것 같은 숨 막히는 하루였다”고 말했다. 런던 필 관계자는 한밤중에 지휘자를 찾아내 공연을 진행시킨 예술의전당에 대해 ‘대단하다’(fantastic team)고 감탄했다.
쿠르트 마주어를 대신해 25일 런던 필을 지휘한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협연자인 장영주와 함께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