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에게 이 계절은 또 한번 고통이고 시련이다.상황이 어렵기로는 2개의 전선에서 모두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 못지 않다. 10.25 재보선 참패가 촉발한 분란이고 압박이지만, 뿌리는 더 깊고 근원적인 데 닿아있다.
대통령이 당의 총재인, 한국적 정치 현실에서 항상 '사당(私黨)적 운영 행태'로 비판받는 집권당에서, 전면적인 당정 쇄신 요구가 바로 총재 대통령을 직접 겨냥해서 분출하고 있다.
흡사 '들이대는' 형국이다.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위협이, 입가진 이들이 쏟아내는 한목소리다.
"민심이 분노하고 있다"는 진단은 재보선에서 낙선한 민주당 김한길 후보의 소감이다. 민심 앞에서 크게 놀란 그의 표정이 짐작된다.
'분노'는 "등돌렸다"는 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다.
"몰라준다"거나 "억울하다",또는 "홍보가 부족하다"는 인식은 어림없는 투정일 뿐이다. 정말 '똑바로' 보아야 한다.
적당히 뭉개고 넘어가거나 알맹이는 젖혀놓고 껍데기만 논의하는 식으로는 돌이킬 길이 없다.
말로는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면서 실제로는 '겸허'한 구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참패 이후 전개되는 요즘의 당내담론은 민심과는 또 한번 동떨어진 모습이다.
민심이 분노하는 까닭은 이 정권에서 연속적으로 드러나는 권력형 비리, 그로인한 도덕성 실추에 대한 절망 때문이다.
그걸 모를 사람이 없다. 나아질 줄 모르는 인사편향, 더욱 심화하는 지역주의 따위는 포기하는 심경으로 접어둘 수도 있는 일이므로 차라리 곁가지일지 모른다.
민심이 분노한다면, 그 분노를 다독여줄 방법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마땅하다.
고민하는 대신 '대권후보 조기 가시화' 같은 당략적 논의를 제기하는 모습은 국민을 속이는 일이다. 그 논의에 매몰하는 후보군의 면면이야 말로 참으로 국민을 걱정하게 만드는 정치인들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지금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아 보인다. '조기 가시화'론으로 어느새 권력투쟁에 나서는 후보군의 문제를 포함 '차기'일정의 수동적인 관리인으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건곤일척 승부수를 던지는 '전면 쇄신'을 통해 앞으로 1년을 한국 정치사에서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는 기회로 만들어 볼 것이냐.
민주당의 한 소장 의원은 10.25 재보선 참패에 대한 '반성문'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사즉생(私則生)'을 결어(結語)로 삼았다.
나를 버리고 죽어야 그 때 비로소 살 길이 보이리라는 비장한 결의다. '연청'이라는 거대 여당조직의 새 회장이 된 또다른 의원도 취임사에서 같은 말을 썼다.
민주당이 회생할 길은 스스로를 버리는 데서 출발한다는 이 공감대가, 그저 우연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를 버리는 것은 '권력'을 버리는 것이다. 기득권의 작은 한 조각에도 집착을 끊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당과 그총재인 대통령에게 남은 '기회'다.
어떻게 버리고, 어떻게 끊고, 어떻게 죽어야 사는가.
나라의 지도자로서, 그 나라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려 한 몸을 과감히 내던진 모습이 6.15였듯이, 정권과 국가의 도덕성을 세우는 데에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이 그의 최후의 투신을 주저할 까닭은 없다.
야당 총재의 '답방 반대'표명으로 남북 화해의 큰 걸음 기대도 다시 꼬인 상황이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남은 앞으로 1년을 위해, 이 나라의 긴 장래를 위해서도 '10월의 마지막 밤'의 고뇌와 결단은 중요하다.
가신정치 청산, 정당 민주화, 지역주의 청산…. 정답은 벌써 언제부터 나와 있다. 버려야 얻는다.
/ 칼럼니스트assisi6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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