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전북 정읍 방죽안 마을이라는 곳이다.뒷산과 앞내를 배경으로 한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동구 밖 느티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시냇가 언덕 위에 핀 무지개를 좇으며 뛰놀던 곳이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인 1965년 7월초로 기억한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 면소재지에 있는 학교까지는 걸어서 40여분 거리였고, 그 중간쯤에 일명 '도깨비방죽'이라고 불렸던 저수지가 있었다.
길이 30~40m, 폭 20여m로 자그마 했지만 수심은 꽤나 깊었던 것 같다.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친구 중 Y는 우리 마을에서 좀 떨어진 '금상동'이라는 산기슭 마을에서 살았다.
'도깨비방죽'에 이르자 누군가가 수영 시합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 당시 여름이면 냇가나 저수지에서 미역을 감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우리 모두는 볼 품 없는 개헤엄 정도는 칠 수 있었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는 내 말에 Y가 먼저 옷을 벗고 뛰어들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5m도 못 가물 속으로 가라 앉더니 잠시 후 저수지 가운데쯤에서 솟구치면서 다급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우리는 Y가 수영솜씨를 자랑하는 줄 알았으나 순식간에 위기를 맞고 있었다.
나는 옷을 입은 채로 물 속으로 뛰어들어 Y를 잡으려고 했으나 둘 다 저수지 한 가운데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몇 번 허우적거리다 Y를 저수지 가장자리 쪽으로 밀쳐낸 순간 나 역시 숨이 막히고 힘이 빠져 친구들을 향해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다행히 물 속에 검정 나무 말뚝이 보였고 이를 의지, 겨우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모두 무사했으나 하마터면 나와 Y, 모두 익사할 뻔했던 위기 상황이었다. 수영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Y군이 우리의 호기에 눌려 만용을 부렸던 것이다.
Y가 이 사실을 그의 부모님께 알려 나는 '생명의 은인'이라는 과분한 칭찬을 들었으나 만일 Y가 익사했더라면 나 역시 평생 그 부담을 안고 살아갔을 것을 생각하면 아찔할 때가 많다.
이후 나는 사소한 일에 좀처럼 호기나 만용을 부리지 않게 됐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다.
불필요한 호기나 만용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는 그 때의 교훈 때문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Y는 지금 지방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서로 안부를 주고 받아 본 것이 10년이나 된 같다. 가을이 가기 전에 Y와 함께 고향 언덕에 걸터앉아 옛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다.
/이석연 경실련 사무총장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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