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니 모레티(48) 감독은 로베르토 베니니, 잔니 아멜리오와 함께 현재 이탈리아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힌다.감독 겸 배우이며 극장주와 배급까지 겸하는 1인 제작 시스템을 고집하고 있는 그는 3명의 감독 중 유럽의 좌파주의적 감독의 맥을 가장 확실하게 잇고 있다.
‘미사는 끝났다’(1985)는 젊은신부를 통해 혼란스런 이탈리아의 자화상을 그린 대표작이다.
올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지낸 난니 모레티는 사실 칸 영화제에서 더 많은 찬사를 받았다. 94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나의 즐거운 일기’는 좌파 몰락 후 희망 없는 현실에 대해 술회하고, 2000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아들의 방’은 현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죽음을 솔직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이 두 편이 국내에 개봉된다.≫
■영화 '아들의 방'
누군가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순간부터 인간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들의 방(La Stanza Del Figlio)’은 아들의 죽음을 맞은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
이탈리아 북부에 사는 조반니(난니 모레티)는 정신과 의사로 성 도착증 환자, 자살 강박증 환자 등 수 많은 환자들의 투정을 참을성 있게 받아들이고, 조언을 해 주는 교과서적인 의사이다.
그러나 이 ‘너그러움’은 아마도 ‘거리 두기’가 가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출판업을 하는 사랑스런 아내 파올라(로라 모란테)와 아들 안드레(주세페 산펠리체), 딸 이레네(야스민 트린카)가 있기 때문이다.
아들 안드레가 스킨 스쿠버를 하다 죽은 후 그의 생은 달라진다.
그는 더 이상 환자들의 고통을 치유할 수 없게 됐다. 자살 강박증 환자가 일요일 아침, 그를 호출하지만 않았어도 안드레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암에 걸리니 살고 싶다는 생각밖엔 없다"는 환자를 마주하고 앉으면, 오로지 아들이 그를 대신해 죽었다는 생각만이 들 뿐이다.
영화는 그러나 안드레가 죽기 전 발생한 절도 사건을 묘사하면서 가족 간에 상존하는,그리고 인간 사이에 필연적인 불신과 불안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친구의 모함으로 암모나이트 절도 용의자로 몰린 아들을 믿고, 아들에게도 “너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는 아들이 없는 방에 들어갔다가 자신을 반성하고 되돌아 나오기도 한다.
구체화할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이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을 때에도 카메라는 매우 냉정한 시각을 유지한다.
관에 누운 아들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관을 납땜질하고 못을 박아 넣는 장면을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죽음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물질 명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지적인 탐구 못지 않게 영화에는 죽음과 상실의 결과물인 울음과 눈물이 끊임없이 흐른다.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버지를 연기한 난니 모레티의 눈물이 자신의 눈물처럼 여겨질 만한 영화이다.
작품성보다는 대중적 호소력이 큰 영화이다. 11월 3일 개봉.
박은주기자
jupe@hk.co.kr
■나의 즐거운 일기
난니 모레티는 일기를 썼다. 그리고 그 일부를 발췌해 1994년 영화를 만들었다.
‘나의 즐거운 일기’(Caro Diario)의 주인공은 바로 감독 자신이다.
‘스쿠터를 타고’ ‘섬’ ‘의사’ 3편의 옴니버스 구성의 이 작품은 현대 이탈리아에 대한 그의 진지한 현실 인식이 담겨있다.
하지만 투덜거리듯 늘어놓는 내레이션은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웃음이 끊일 새가 없다.
촬영장소 헌팅을 빙자해 스쿠터를 타고 로마의 거리를 쏘다니는 모레티. “소수의 편에 서겠다”는 정의파다.
그는 끈적끈적한 에로영화가 판치는 여름휴가철 로마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패배주의에 젖은 급진주의자들을 질근질근 씹어댄다.
내용 없이 현학적이기만 한 영화평론에도 일침을 가한다.
그는 조용히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 위해 시실리의 섬을 찾아간다.
아이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거나, 공약을 남발해 신뢰를 잃어버린 정치인, 드라마나 TV 등 매스미디어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모습 등.
전통의 가치가 무너진 현재의 이탈리아 어느 곳도 그가 머물만한 데는 없었다.
그의 신랄한 목소리는 ‘의사들’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가려움증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오진만 해대던 권위적인 의사들. 그가 늘어놓은 약들은 분노에 가까운 비난이다.
‘나의 즐거운 일기’는 괴짜 감독 모레티를 이해하는 통로이다.
1994년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11월 5일부터 서울 하이퍼텍 나다에서 ‘아들의 방’과 1일 3회 번갈아 상영한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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