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어 기지(53) 전 민사당당수를 만난 것은 베를린시장 선거일 사흘 전인 18일 베를린 연방의회 부근 민사당 선거운동본부 사무실에서였다.그는 이번 베를린시장 선거에 민사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는 통일 이전부터 두 분단국가를 부둥켜안아 온 이 운명적 독일의 수도가 통일 11년 후 그 동안의 경과에 대해 과연 어떤 보고서를 작성해낼 것인지 주목되는 ‘철학적’ 선거였다.
특히 통일 독일 속에 감히 공산당이라는 치명적인 옛 유산을 끌어안고 들어와 11년간 변신과 생존수업을 톡톡히 치러낸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 민사당이 유권자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될 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우리는 독일 통일의 날인1990년 10월 3일까지 동독 시민이었음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통일을 통해 새 독일에 가입됐고 시퍼렇게 살아 약동하는 자본주의에 합류된 것입니다. 민주주의, 인간 존엄, 자유가 손상되면서 동독은 종말을 맞았습니다. 동독은 자기만족, 자기 황홀 속에 갇힌 채 스탈린주의적인폐쇄된 세계관 속에서, 개방화하고 세계화하는 세계 정치무대에서 인간에 대한 질문에 더 이상 답할 수 없게 되자 돌연 멸망해버린 것입니다. 솔직히 통일의 전령인 라이프치히평화혁명은 너무 늦게 왔습니다. 그렇다고 동독이 모두 나빴던 것은 아닙니다. 동독은 공동체적 연대감이 강했고, 적어도 남을 밀어내며 내 일자리를 지켜야 하는 비정한 경쟁사회는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여성은 모든 분야에서 동등했지요. 중요한 것은 독일 통일이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통일이라는사실입니다.”
유명 변호사 출신인 그와 마주앉으면 두 가지 의외성에 놀란다.
우선 그는 동독 공산당 출신정치가답지 않게 언어의 미식가이다. 그에게선 적어도 정치인들의 전염병인 저 위조지폐 같은, 식어 빠진 상투어를 발견할 수 없다.
또 그는 가족 중 18명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학살된 참혹한 가족사를 지닌 유대인이면서도 극우주의자들에 대해 말할 때 무섭도록 침착하고 명료하다.
“독일인들은 너무 독일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그가 히틀러 통치의 악몽을 가능케 했던 독일 국수주의, 파시즘, 외국인 혐오, 반유대주의에 대항하는 방식이다.
그는 특히 자신의 인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당이 제 개인적 인기로 유지된다는 개인숭배적 분석은 반납하고 싶습니다. 저는 정치가로서 항상 직접 만질 수 있고, 저 거리모퉁이까지 가까이 다가와 있는 성취 가능한 유토피아만을 말해왔습니다.”
지난 1월 평양-베이징(北京)-서울을 방문한 그의 소감도 흥미롭다. 특히 과거 동독의 동지였던 북한 방문은 감회도 상처도 많은 여행이었다.
“평양에 도착하니 영하 20도였어요. 외교부 회담장 실내온도는 겨우 영상 3도였습니다. 호텔방도 침실을 제외하곤 냉방이었지요. 서울에서 한국 정치인들에게 북한에 대한 전력 지원을 역설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식량보다는 차라리 전력이 더 시급해 보였어요. 호텔에서 개인외출은 금지돼 있었습니다. 난 18세가 아니라고 말했지요. 북한측은 통역자와 함께 거리로 나가 주민들과 접촉하는 것을 차단한 겁니다. 그래서 난 북한이 과연 세계를 향해 자신을 개방할 의지나 준비가 돼 있는 지를 의심해야 했습니다. 북한의 협력 기대에도 불구하고 북한 노동당과 우리 당 간의 이념적ㆍ정치적 차이는 너무 컸습니다. 북한의 그 지독한 폐쇄성, 개인숭배 때문에 난 분열된 심정으로 평양을 떠나야만했습니다.”
평양을 떠나 들렀던 베이징에서그는 중국 수뇌들의 적극적인 개방의욕과 활력에 놀란다.
서울을 방문하고 판문점에 들르던 날은 마침 그의 생일이었다. 그는 그날 목격한 남ㆍ북한 대치상황을 20세기적 시행착오라고 말한다.
그는 현재의 남북 상황이 통일 직전 동ㆍ서독상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데 놀랐음을 고백한다.
9월 라이프치히 민사당 로자룩셈부르크 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린 당 정책 입안 간부회(이념과 정치철학 토론회의)는 동독 출신 좌파 지식인들이 통일 후 과연 어떻게 과거의 이념을 검증ㆍ수정해가고 있는 지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리였다.
그들은 말한다. “통일 후 11년간 우리는 과연 통일 속에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또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 지 기다리고 고대해 왔다. 우리는 동독을 사회평등은 있었지만 개인적 자유가 없었던 제국으로 추억한다. 그리고 지금 통일 11년 이 사회의 모습은 ‘불평등 속의 정의’이다.”
이 좌파 지식인들은 당연히 자본주의속에서 인간이 갖게 된 운명에 주목한다.
인간이 단지 거대한 소비시장의 덩어리로 간주되는 자본주의적 인간관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개인이 사유재산을 갖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그 추상적 폭력에 그들은 충격 받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집요한 토론속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은 이익과 함께 더 많은 정의도 얻어야만 하는가? 둘째, 인간은 소비할 수 있는 만큼만 사는가?”
구 동독 시민 최고의 공포는 실업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이에게 일자리가 주어지는 사회를 한껏 꿈꾼다.
그 실현을 위해 그들은 온 사회가 노동시간을 줄여서라도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나누어야만 한다고 소망한다.
이익과 소유, 성공이 전부인사회에서 인간은 살기 위해 소비하는가, 소비할 수 있기 위해 사는 가라고 묻는 이 평등의 신봉자들의 질문은 고전적이고 충격적이다. 그들은 소비가 사색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터뷰 사흘 후인 10월21일 치른 베를린시장 선거에서 기지의 민사당은 22%의 지지를 획득해 기대 이상으로 선전했다.
특히 선거구호였던 ‘절대 반전(反戰)’은 젊은 유권자들로부터 놀라운 지지를 얻어냈다. 동베를린시민 중 47%, 서베를린 시민 중 7%가 민사당에 표를 던졌다.
민사당은 모든 계층으로부터 골고루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옛 공산당의 늙은 당원 표로 연명하는 정당이라는 편견을 극복해낸 셈이다.
그러나 많은 구 동독 시민들조차 민사당에 대해 아직도 “너무 붉다”라고 지적한다.
도대체 조국을 거대한 수용소로 만들었던 역사의 가해자인 동독 공산당 후신에게 어떻게 표를 줄수 있는 지 경악하는 구 동독 시민도 많다.
중요한 것은 베를린 시민들이 민사당의 연정 참여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 통일 11주년에 실시된베를 린시장 선거는 독일 공산당의 산모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후예들이 과연 어떻게 역사와 화해하고 변신하며 생존에 몸부림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삽화였다.
/재독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