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아침 전국의 지법·지원에서 치러지는 즉결심판. 전날 밤의 객기를 후회하는 취객, 처분에 이의를 신청한 교통위반자, 술집 접대부, 포장마차 주인, 삐끼, 포주, 조무라기동네 건달… 번듯한 법정에야 행세깨나 하는 이들도 많지만, 이곳에 모이는 이들은 대개가 사는 일이 힘겹고 고달픈 이들이다.그동안 세태가 그토록 변했어도 즉심재판정의풍경은 수십년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즉심 현장을 통해 우리들삶의 애환을 들여다 본다. /편집자 주
▦ 장면1 - 개정 한시간 전
25일 오전 9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지법 2층 즉결법원출입구 앞 흡연실.
50대 사내가 경찰관의 귀찮은 표정에도 아랑곳 없이 연신 뭔가를 호소하고 있다. “2만원이 아까워서 온 게 아니에요.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그 XX가 너무 괘씸하잖아요. 30년 택시 몰면서 이런 일이 없었어요. 여기서 벌금 받으면 그 XX 무고죄로 고발해 버릴 거에요.”
경관은 사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옆의 후배 경관과 이야기를 나눈다. “참내, 딱 떨어지는 승차거부를 해놓고도 저래. 요전날 밤에 손님이랑 같이 파출소로 왔더라고. 사실 손님이 좀악질같다는 느낌은 들었는데 승차거부 한 건 사실이거든.
딱지야 2만원이지만 구청에 넘어가면 또 20만원이 붙잖아. 그게 아까워 이의신청 낸 거지.” 후배 경관이 말을 받았다. “신호위반 해 놓고 비보호 좌회전이라고 계속 우기는 저 사람때문에 저도 나왔지 뭐예요.”
▦ 장면 2 - 개정 30분 전
역시 흡연실. 앞의 택시기사와 비보호 좌회전을 주장하는 40대 사내가 마주 앉았다. 50대가 40대에게 좀 전 경찰관에게 했던 하소연을 되풀이한다.
- (50대) “정말 법이 X같지. 만약 이번에 벌금 때리면 뒤엎어버릴 거요.”
- (40대) “저도 억울해서 이의신청 냈는데 말이죠, 오늘 유죄판정 받으면 과태료가 벌금으로 바뀐다네요, 무슨 법이 이래요? 이의신청도 말에요, 서울지청(그는 서울경찰청을 이렇게 표현했다)으로 넣으려고 했더니 못 넣게 하더라고. 해당 경찰서로 하라는 겁니다.
바로 옆 자리에 앉은 같은 편끼리 들어주겠어요?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지… 평소 같으면 귀찮아서 그냥 6만원내고 말겠는데 그 네거리가 하루에도 수백번 좌회전이 이뤄지는 곳인거라. 내가 경찰들한테 그랬어요. ‘좌회전 금지 표식이라도 일단 설치해라, 그럼 6만원 내겠다’고 말이죠.”
- (50대) “새벽까지 운전하고 쉬지도 못하고 나왔는데 한시간이나 기다리게 하고….10시 시작인데 왜 9시까지 나오라 그래?”
▦ 장면 3 - 개정 15분 전
법정 출입구 앞 대기의자에 남루한 차림을 한 중로(中老)의 여인이 넋을 놓고 앉아있다. “내가 젊어서는 파출소도 모르고 지낸 사람이야. 근데 1년 새 벌써 3번째 즉결이여. 앞서 두번은 벌금먹고 말았는디… 아구찜 장사를 하는데 바로 옆집에 젊은 년이 같은 장사를 시작한 것 아니겄어?
먹고 살려니 어쩌겄어, 손님 끌려구 삐끼 좀 했제. 근데 이번엔 참말로 억울혀. 고향 사람이 지나가길래 하도 반가워 소매를 잡아당겼는데 ‘빽차(경찰 순찰차)’가 지나가다 삐끼로 오해한 거야. 하도 어이가 없어 발길질을 몇 번 했지. 하지만 늙은 년이 몸싸움을 하면 얼마나했겠어? 그게 고까워 가지고…. 주변에 짱짱한 사람 있으면 어떻게 손이라도 써 보겠는디…. 판사야 서류만 보고 때리겄지.
때리면 맞아야지 어쩌겄어.법이란 게 약한 사람만 죽게 만드는 거야. 부모도 없는 손자 하나 키우는데 구류 며칠 살면 애나 장사나 절딴인디….”
▦ 장면 4 - 개정
9시55분. “즉심 대상자들 입정하세요.” 법원 직원의 안내에 따라 ‘피의자’들이 주볏주볏 법정 안으로 들어선다. 조금 전까지의 호기들은 금세 간 곳이 없고 다들 풀 죽고 불안한 표정들이다.
판사가 입정하기 전까지 몇 분 동안 침묵 속의 긴장감이 법정 안을 채운다. 10시5분검은 법복을 입은 젊은 판사들(주심과 부심 둘)이 들어서자 법정경위가 외친다. “일동 기립.”
“공지사항부터 말씀 드립니다. 피고는 불리한 증언에 대해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중략), 벌금 및 구류 선고에 대해 불복할 경우 1주일 내에 해당 경찰서에 이의신청을 하기 바랍니다. 피고는 호명과 동시에 피고인석으로 나와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말하십시오.” 판사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건조하고 사무적이다.
▦ 장면 5 - 심판
# 전날 밤 취객 1
- (판사, 사건 기록을 들춰보며) 건물 경비원과 시비도중 단속 경찰관에게 행패 부린적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 전과도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랬습니까?
“술 먹고 실수로….”
- 평소 주사(酒邪)가 있으면 조심을 해야지요. 이런 경우 공무집행방해로 입건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조심하세요. 전과도 없고 술에 취했다니…. 벌금 10만원 내십시오. (피고 안도하는 표정으로 황급히 퇴정)
# 전날 밤 취객 2
- 오늘 새벽 길거리에서 행인들에게 시비 걸고 차도에 드러눕고 파출소 가서 행패 부리셨죠?
“술이 원수입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 아무리 술이 취해도 그렇지…. 경찰관을 보면 그만둬야지요. 구류 4일 선고합니다.(피고 머리를 긁적이며 퇴정)
# 앞서 중로의 여인
- 주민번호 말씀하시라니까요?
“(우물우물하며) 아직 못 외웠는데….”(판사, 어이없다는 표정)
- 호객행위로 걸리셨죠?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어요. 영감은 6ㆍ25때 죽고 아들도 먼저가고, 손자 놈 키우며 먹고 살려다 보니….(순간 울음을 터뜨린다)
- (판사, 쓴 웃음을 지으며) 자꾸 우는 소리 하시면 안됩니다. 벌써 세번째시죠?
“이번에는 정말 억울해요. 고향 친척이 왔길래 손을 잡은 것 뿐인데. 요즘 관절이 아파서‘삐끼’하고 싶어도 못해요. 손자, 손녀 세 식구 사는데…. (계속 울먹인다)”
- 앞으로 한번만 더 그러면 구류 살릴 거예요. 벌금 10만원. (피고. 눈물을 뚝뚝흘리며 ‘진짜 감사합니다’를 연발. 법정경위가 와서 끌고 나간다)
# 앞서 40대 남자
- 좌회전 허가 표지도 없는데 좌회전 왜 하셨습니까?
“일반적으로 다들 하는 장소이고….”
- 허가 표시가 없잖아요. 되는 걸 가지고 이의신청을 해야지.
“서울지청 교통지도계에 문의하니 비보호 좌회전이라고 그러던데요.”
- 그건 반대편 방향일 경우에 해당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다 한다고 해서 따라하는 것도죄가 됩니다. 아시겠어요? 벌금 6만원입니다.
# 앞서 50대 택시운전사
- 이의신청서에 있는 피고인 진술을 봐도 승차거부는 명확한 것 같은데요?
“제가 “교대시간이 돼서 그러는데 다른 차를 이용해 달라”고 정중히 말했습니다. 그러니까“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느냐, 경찰서로 가자”고 그러는 거에요. 파출소에서 경찰까지도 “그냥 타시고 가라”고 타이르는데도 막무가내였어요.”
- 그러니까 승차거부를 했다는 겁니까, 안 했다는 겁니까?
“제가 직접 내리라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신차 더러워서 안탄다’는 둥 제가욕을 얼마나 먹었는데요.”
- (판사, 손을 내저으며) 알았어요. 다른 차 타고 가라고 말한 것 자체가 승차거부가됩니다. 과태료 납부하세요.
“내리라는 말도 안 했는데 죄가 됩니까?(혀를 끌끌 차면서 퇴정)
# 버스 전용차선 위반자
- 위반하셨죠?
“억울합니다. 저는 분명히 점선 부근에서 진입했습니다. 그곳은 실선 구간이 10m 밖에안돼요. (소형 비디오 카메라를 탁자 위에 올리며) 제가 현장을 직접 촬영해 왔습니다. 실제 도로사정은 생각도 않고….”
- (판사, 출석한 공익요원에게) 그 도로 실선 구간이 얼마나 됩니까?
“80m 정도 됩니다.”
- 피고는 그런데 10m 밖에 안된다고 해요?
“비디오 보시면 아실 거라니까요.”
- 공익요원이 거짓말할 것 같지는 않고…. 위반으로 인정합니다. 5만원 내세요.”
“(피고, 비디오 카메라를 흔들며) 판사님, 이거 한번만 봐 주세요. 정말 80m라면제가 인정을 할께요.”
- 불복하겠거든 정식재판 청구하세요. (피고. 상기된 표정으로 퇴정)
# 파고다공원의 노인상대 50대 윤락녀
- 파고다공원 갔었지요? 왜 이런 짓을 했어요?
“남편도 없고 애들은 2명이나 되고….”
- 딸은 25살이고 아들은 19살이네? 자기들이 알아서 먹고 살 나이인데, 왜 성인자녀 핑계를 대고 그래요? 구류 3일.
# 20대 초반 스토커
- 000가 누구요?
“아는 누나인데요.”
- (판사, 실소를 머금으며) 왜 쫓아다니며 괴롭혀? 좋아하는 거예요? 좋아하는데 안만나주나?칼까지 들이대며 위협했다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칼이 아니고 볼펜인데요.”
-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한번 만나서 진짜 싫다고 그러면 끝내겠습니다.”
- 무서워 죽겠다는데 또 만나? 결혼식 찾아가서 죽인다고 협박했다면서? 구류 5일.
# 무전취식·탑승자
- 왜 돈도 없이 술먹었습니까?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요. 같이 술마시던 친구가 갑자기 없어지는 바람에…. 마침 카드도안 먹고 해서.”
- 왜 돈 없이 택시를 탔습니까?
“집에 와서 주려고 했는데, 마침 집사람이 없지 뭡니까.”
- 각각 벌금 5만원씩 선고합니다.
# 나이트클럽 삐끼
- 나이트클럽의 선전명함 나눠주다 걸렸지요?
“죄송합니다. 일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위법인줄 몰랐습니다.”
- 호객행위는 무조건 구류 살리는데 초범이고 하니 봐 주겠어요. 벌금 10만원.
“희색이 만면해 절까지 꾸벅하며)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 장면 6 - 폐정 후
즉심이 끝나는 데는 아무리 길어도 30분이면 족하다. 한 명당 2~3분을 넘는 법이없다. 선고를 받은 피고인들은 법정 아래층 경찰관 사무실로 내려와 벌금을 납부한다. 구류 선고를 받은 사람은 사무실 한 켠에 별도로 설치된 ‘피고인보호실’에서 호송을 기다린다. 그들은 앞으로 며칠씩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
한 경찰관이 앞서의 ‘삐끼’에게 농을 걸었다. “너 임마 오늘 운 좋은 줄 알어.좋은 판사님 만나서 벌금 받은 거야. 한번만 더 걸리면 그땐 어림없다.”
비디오카메라를 증거물로 제시하려다 실패한 피고는 분이 안 풀리는지 직원들에게 “정식재판청구해서 승소하면 손해배상 받을 수 있나”고 재차 물었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 즉심 시대별 유형
즉심에 회부된 사람들의 사연을 살펴보면 각 시대를 반영하는 일정한 유형이 발견된다.
궁핍한 1950~60년대 무전취식과 노숙으로 구류 선고를 받은 사람이 유독 많았다면,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에 적발돼 서울 은평구 응암동의 즉결재판소에 줄지어 순서를 기다리던 대학생들의 모습은 ‘청년문화’가 피어나던 70년대만의 풍경이었다.
80년대부터는 불법시위로 인한 즉심회부자가 급증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개인과 이익집단의 권리찾기가 주류를 이루면서 즉심에 회부된 시위자들의 사연도 사뭇 달라졌다.
올해 4월 김모(40)씨는 정부의 레미콘 노조 설립불허에 항의, 서울 도심에서 해골마스크를 쓰고 온 몸에 흰 붕대를 감은 미라 분장으로 1인 시위를 벌이다 ‘타인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즉심에 회부됐다.
배모(60)씨는 한국전 상이용사인 선친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부인과함께 대검 청사 앞길에서 무려 270일간 농성을 한 끝에 즉심에서 구류 20일을 선고받았다.
재미삼아 장난 전화를 걸었다가 졸지에 즉심 재판정에 끌려나가는 사람들이 느는것도 통신추적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최근의 특징. 17일 서울경찰청 112 신고센터에 “63빌딩을 폭파하겠다”고 공중전화를 걸었던 홍모(30)씨는 10분만에 붙잡혀구류 25일을 살게 됐다.
신고센터에 따르면 허위 신고전화로 즉심에 회부되는 경우가 매달 10여명이나 된다.
코미디같은 경우도 많다. 광주지역 폭력조직 ‘국제PJ파’ 행동대원 10명은 시내 한복판에 일렬로 늘어서 선배가지나갈 때마다 일제히 90도 각도로 절을 하고 행인들에게 인상을 쓰다 몽땅 구류를 살았다.
배꼽티를 입고 다니다 즉심에 넘겨진 20대 여성 두명은 “배꼽 노출이 불쾌감을 주지는 않는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올 봄에는 서울종로경찰서가 탑골, 종묘공원 노인들을 대상으로 윤락을 해온 이른바 ‘박카스 아줌마’ 소탕작전에 나서 22명을 무더기로 즉심에 넘기기도 했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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