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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伊藤博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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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伊藤博文

입력
2001.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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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26일 일본의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에게 사살됐다. 68세때였다.이토는 한국인들에게는 침략의 원흉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근대화의 아버지이자 일세의 영웅이다. 그는 일본의 근대적 헌법과 형법을 기초했고, 총리만 네 차례를 지냈다.

그는 또 집안의 배경 없이 자신의노력과 재능만으로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토는 1841년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하층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하야시 도시스케(林利助)다.

7세때 하급 무사 집안인 이토가(伊藤家)에 입양돼 성이이토가 되었다. 개화파 선구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공부한 뒤 영국에 유학한 이토는 귀국해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참가했고, 그 뒤 40여년간 장관, 총리, 전권대사, 정당 대표, 추밀원 의장 등 정계의 요직을 거치며 일본 역사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한일합방 직전까지 일본의 모든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는 이토의 손길이 닿았다. 그는 미국에 파견돼 화폐제도와 은행제도를 조사했고, 미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청나라 등과의 협상에 전권대사로 참여해 일본 외교의 틀을 짰으며, 국회의 개설과 동시에 귀족원 의장이 돼 양원제 의회의 확립에 기여했다.

러일 전쟁 직후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한국 병탄의 기초를 다지던 이토는 1909년 통감직을 사임하고 추밀원의장이 됐다.

그는 그 해 만주 시찰 중 러시아 재무대신과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내렸다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1979년 10월26일에는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됐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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