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전쯤 검찰에 출입할 때의 일이다.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언론사들이 많지 않아 신문과 방송을 합해서 9개 언론사의 기자들 밖에 없었다.
또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각 언론사별로 출입기자를 2명씩으로 묶어 서소문의 검찰청사에는 겨우 18명의 기자만이 있었다. 지금은 각 사별로 6-7명씩의 기자들을 내보내고 있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우리들 말고도 취재경쟁을 벌이는 또다른 기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관선기자'(官選記者)라고 불렀다. 안기부, 경찰, 보안사 등에서 나온 정보요원이다.
이들이 속한 기관은 업무적으로 당연히 검찰과 관련이 있지만 이들의 업무는 그것과 관계가 없었다. 검찰에서 돌아가는 일이나 검찰 간부의 동향 등을 취재하는 게 그들의 일이었다.
세월이 상당히 흘렀지만 아직도 관선기자들이 도처에 눈에 띤다. 그때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검찰을 출입하는 후배기자에게 물어보니 아직도 검찰청 주변에 그들이 얼씬거리고 있다고 한다.
또 사회부의 데스크를 맡은 뒤 국정원, 경찰, 기무사 등에서 있다는 사람들이 "한번 봅시다"라며 '협조요청'을 해왔다.
자기 말로는 '한국일보 담당'이라고 했지만 확인 결과 각 기관의 공보담당 파트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이들 역시 신문사 돌아가는 일을 살피는 관선기자들이다.
국가정보원법에는 소속 직원의 업무를 '국외 정보 및 국내 보안정보의 수집, 작성, 배포'로 규정하고 있다.
이 법 3조에는 국내 보안정보로 대공(對共), 대정부 전복, 방첩, 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으로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또 경찰관집무집행법에도 정보활동의 근거로 '치안정보의 수집, 작성 및 배포'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들 관선기자와 접촉했던 경우를 살펴보면 도저히 법에 정한 활동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신문에 무슨 기사가 나는지 알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속한 기관에 불리한 기사가 나면 즉각적으로 로비를 한다.
심지어 다른 정부기관을 비판하는 기사가 게재된다는 것을 미리 알고 "기사를 빼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이밖에도 신문사의 경영진이나 주요 간부의 동향을 파악하는 일도 그들의 주요 관심사인 것 같다.
경찰 간부한테 이 같은 정보활동의 근거를 물어보았더니 "각 경찰서에 언론사 출입기자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신문사의 경우 기사와 관련한 분쟁으로 집회 또는 민원인의 시위 등이 야기될 수 있기 때문에 치안정보 수집의 차원에서 신문사를 담당하는 정보형사가 있다"고 말했다.
정보업무를 담당하는 다른 간부는 "그렇다면 경찰서를 출입하는 기자들이 경찰 업무나 분위기를 챙겨가는 것도 불법이냐"는 반문도 했다.
요즘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민주당의 김홍일(金弘一) 의원 일만 해도 그렇다.
제주경찰청장은 방송에 나와 "김 의원이 대통령의 아들이기 때문에 경호상의 이유가 있어서 동향을 체크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 것 같다.
정작 경호상의 문제가 있었으면 청와대경호실에서 제주경찰에 연락했을 터인데 정보형사가 항공사의 승객명단을 훑어보고 김 의원의 도착 사실을 파악하고 나아가 누구누구와 동행했는지까지 보고했다는 것에 아마 김 의원 자신도 기분 나빴을 것이다.
경찰이 한나라당 제주지부 사무실을 압수수색해서 가져간 문건 중에 '국회의원 축구단 래도(來道)'에 관한 경찰 정보보고도 있었다는 것을 보면 "김 의원같이 특수한 경우만 동향보고를 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이 같은 일들에 대해 해당기관들은 죽어도 "사찰이 아니다"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찰에 다름 아니다. 독재시절의 관행을 그대로 좇고 있는 것이다.
신재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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