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잡아라"1992년 서태지 이후 등장한 댄스 음악-10대-TV의 10년 아성이 흔들리고 있다. 대신 비(非)댄스-20대-탈(脫)TV라는 새로운 삼각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가요 관계자들은 “1, 2년 전부터 하나 둘 시작된 변화가 최근 들어 시장 전체에 걸쳐 뚜렷한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음반산업협회가 집계한 올 9월까지의 음반 판매를 보더라도 올해 나온 음반 중 40만장 이상 팔린 5장 가운데 10대 취향의 댄스는 쿨 6집(58만장) 하나다. 9월에 가장 많이 팔린 10장의 음반 중에도 유승준의 ‘Wow’ 하나 뿐이다.
변화의 핵심은 20대다. ‘20대’ 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20대가 좋아하는 음악이 통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실제 20대 소비자가 음반을 구매한다는 뜻도 된다.
마치 90년대 초반 댄스 음악이 막 구매력을 갖추기 시작한 10대에게 어필했고, 10대가 음반 시장의 주소비자가 되자 이들을 겨냥한 댄스 음악과 TV 위주의 활동이 성행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20대가 좋아하고 소비하는 음악은 발라드나 R&B 같은 장르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발라드나 R&B가 댄스의 뒤를 잇는 흐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속에 특별한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 20대를 사로잡을 수있다.
최근 히트한 몇몇 노래들을 분석해 보면 그 일단을 잡아낼 수 있다. 대부분 스타의 이름값에 의존하지 않고, 불황에 허덕이는 음반 시장에서 빠른 속도로 팔려 나가고 있는 노래들. TV 보다는 라이브, 뮤직 비디오, 라디오 에서 더 자주 접할 수 있는 노래들이다.
#감성
한마디로 ’나를 울릴 수 있느냐’는 게 포인트다.
20대 중에서도 여성들이 음악에 좀 더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요즘 히트곡 대부분이 빠르지 않은 발라드 또는 R&B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제까지 20만장이 팔린 이기찬의 ‘또 한번 사랑은가고’를 제작한 유리기획 김평희 사장은 “처음 클라이막스 8마디를 들었을 때 눈물이 났다. 바로 타이틀 곡으로 정했다”고 말한다.
고급스럽기는 했지만 다소 부담스러웠던 이기찬의 노래 스타일을 편안하게 바꿔, 듣는 사람이 자기 감정을 실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왁스와 애즈원은 노랫말로 어필한다.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는 지난 사랑에 대한 회한을 절절하게 노래한다.
‘그땐 너무 어렸어 몰랐던 사랑을 이제야 알겠어’는 스무 살은 넘어야 고개를 끄덕일법한 가사다. 마치 멜로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 애즈원의 ‘천만에요’도 마찬가지다. 극적이지는 않지만 20대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실연의 순간을 담담히 그려낸다.
눈물을 떨구게 하지는 않지만 ‘천만에, 괜찮다’는 노랫말이 그만큼의 공감을 얻는다. 브라운 아이즈의‘벌써 1년’도 노랫말이 힘을 발한다.
#이미지
세련되고 고급스러울 것, 그리고 의식과 실력을 갖췄다는 믿음을 줄 것. 옷차림이나 생김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미지 덕을 본 대표적인 경우는 20대가 음반 판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브라운아이즈.
음반 발매 전, 세련된 차은택 감독의 뮤직 비디오로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만든 뒤, 음반이 발매된 후에는 ‘얼굴없는 가수’로 대중들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1위 후보까지 올랐음에도 TV 순위 프로그램은 사양했고 갤러리에서의 전시회 겸 연주회, 노 개런티 CF 출연 등으로 음악 실력 외에 뭔가 있는, 남다른 가수라는 이미지까지 확고하게 만들었다.
브라운 아이즈처럼 전략적이지는 않지만, 명문대 출신에 나름대로의 색깔을 지닌 유희열과 성시경도 20대에게 어필하는 이미지다. 각각 29만과 25만장의 음반 판매를 기록 중이다.
#가창력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무엇보다 가창력을 갖추어야 한다. 가창력이 있다면 립 싱크를 해야 하는 TV보다 무대에서 직접 노래하는 라이브가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불문가지.
R&B 가수 박효신과 박화요비, t 등이 그렇다. 독특한 음색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던 박효신은 ‘먼곳에서’로 35만장을 기록해 2년생 징크스에 대한 염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t는 기교도 기교지만 아랫배에서 올라오는 힘있는 창법으로 R&B 여가수중에서 가장 파워있는 보컬로 인정받고 있다.
수록곡 전부가 들을 만해 20대들이 자주 가는 카페에서 음반을 통째로 트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덕분에 그룹 출신 솔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가요계의 속설을 뒤집은 또 하나의 사례가 되고 있다.
방송에서도 라이브를 들을 수 있었던 왁스나 라이브 콘서트를 주요 활동 무대로 삼고 있는 이기찬도 수준급 노래 실력으로 노랫말과 멜로디의 호소력을 더하고 있다.
이들 히트곡을 만든 제작자들은 하나같이 “의도적으로 20대를 겨냥해서 만든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브라운아이즈를 발탁한 갑 엔터테인먼트 박종갑 사장은 “음악의 수준을 다소 높게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특정 연령대를 타깃으로 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20대가 주요 소비자가 됐을 뿐이다. 맹목적으로 특정 가수를 좋아하는 10대에 비해 좋은 노래, 좋은음악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20대의 특성인 모양”이라고 했다.
여기에 10대용 댄스 음악이 음악적으로나 시각적으로 한계에 달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지닌다. 지난 10년간 요지부동이었던 가요계의 질서가 변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김지영기자koshaq@hk.co.kr
■귀가 까다로운 20대 일단 붙잡으면 확실
실제로 요즘 ‘잘나가는 앨범’의 주 소비층은 20대다.
인터넷 음반쇼핑몰 시디프리(www. cdfree. co. kr)의 판매량 집계에 따르면 10위권에 드는 주요 앨범의전체 구매량 중 20대 소비자의 비율이 71%(왁스), 69%(브라운아이즈), 62%(이기찬), 62%(t)에 달한다.
20대는 귀가 까다롭다. 검색엔진 라이코스에 등록된 유승준, 조성모 등의 팬페이지는 150~160개. 반면 왁스, 이기찬, 브라운아이즈 등의 팬페이지 숫자는 4~10개에 불과하다.
요컨대 ‘가수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들어보니 좋아서’ 음반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이돌스타의 팬이 20대로 진입하면서 이런 실속구매 경향을 보인다. H.O.T의 팬클럽 회원이었던 박지현(20)씨는 최근 라디오에서 노래를 듣고 ‘t’앨범을 샀다.
다른 아이돌스타에는 관심이 없다. “방송에서보면 됐지 앨범까지는 살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일단 붙잡으면 미더운 소비자다. 갑엔터테인먼트 고종석 기획실장은 “20대를 중심으로 바람이 불면서 판매가 30대 이후까지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열성팬들이 초반에 총 판매량의 80% 이상을 소화하면 추가수요를 기대하기 힘든 ‘10대용’음반과는 달리 20대들은 일단 불붙으면 꾸준한 입소문으로 다른 세대의 소비까지 이끈다.
마케팅도 ‘저비용 고효율’이다. 한 관계자는 “댄스그룹 홍보에는 보통 2억원 정도 든다. 하지만 20대를 대상으로 한 음반은 홍보비가 그10분의 1 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20대를 향한 구애의 손길이 뜨겁다. 대형 음반사에서 ‘가창력’과‘음악성’을 기준으로 가수를 속속 발굴할 뿐 아니라 오디션의 경향도 바뀌고 있다.
연예제작사 잘넷(zallnet)과 함께 ‘드림오디션 2001’을 주최한 다음커뮤니케이션 정규철 엔터테인먼트 팀장은 “철저히 음악성을 위주로 수상자를 뽑았다. 비주얼과 춤등 ‘10대용’ 오디션으로는 변하는 시장에 대응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앨범의 방향을 수정하기도 한다. 임창정, UN등이 소속된 라플엔터테인먼트측은 “12월 발매할 김현성의 음반을 20대의 취향에 맞춰더 애절하게, 감성적으로 다듬고 있다”고 말한다.
20대 붐은 음반시장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음악평론가 송기철씨는 “시장이 댄스음악 편중에서 벗어나 균형을 찾고 있다는 징후다. 단 소비자층이 두텁게 형성될 수 있도록 질높은 음반이 꾸준히 나와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양은경기자 key@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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