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테러 발생 한 달이 지날 즈음, 미국 테러 전문가가 쓴 빈 라덴 전기가 우리 언론에 소개됐다. 97년 나온 전기의 개정판이 다음달 출간될 예정이지만, 이를 국내 출판사가 먼저 입수해 번역판을 낸다는 설명이었다. 어느 신문은 '빈 라덴 집중 탐구'란 표제 아래 발췌한 내용을 한 면 가득 채웠다.그 집중 탐구는 빈 라덴이 이복형제가 52명이고 소싯적에 창녀촌을 드나든 바람둥이였다는 험담으로 시작한다.
이 정도는 흥미 유발용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러시아 마피아와 손 잡은 마약 거래와 돈세탁, 매춘으로 테러 지원 자금을 조달한다는 얘기는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한층 미심쩍은 것은 1998년 옛 유고에서 생화학무기 제조시설을 도입하고 에볼라 바이러스를 러시아에서, 탄저균 샘플을 북한에서 싸게 구입했다는 등의 주장이다. 탄저균 테러 소동을 틈탄 믿거나 말거나식 비화 폭로로 의심되는 것이다.
폭로의 진실성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우크라이나에서 핵무기용 방사능 물질을 입수했다는 주장의 몰상식은 명백하다.
휴대용 핵폭탄을 체첸 공화국에서 300만 달러에 구입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흔해 빠진 흑색선전 수준이란 점이 뚜렷해 진다. 무엇보다 미국 정부가 이런 대단한 정보를 여태껏 몰랐거나 그냥 묻어 둘 리 없다.
이런 황당한 폭로는 흑색선전 연구서만큼이나 흔한 판이니 사실 굳이 비평할 것도 없다.
문제는 이런 따위를 대문짝만한 기사로 다루는 언론의 무지한 행태다. 이건 진실을 파고 드는 탐구가 아니다. 합리적 근거가 없는 것을 믿는 것은 미신이고, 이를 조장하는 것은 혹세무민이다.
빈 라덴의 악마성 탐구가 과장된다고 탈 날 게 있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미신에 갇힌 안목으로 정략과 음모, 흑색 선전과 거짓 보도의 오리무중을 가늠할 수는 없다.
위선적 명분아래 오로지 국익을 다투는 살벌한 국제 정치판을 올바로 읽어 내기는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 언론은 뉴욕 테러와 보복 전쟁을 보도하면서 숱한 미신의 포로가 됐다. 이 미신에 대한 회의가 고개들 무렵, 이를 억누른 것이 탄저균 소동이다.
뉴욕 테러는 눈앞을 스쳐간 먼 곳의 충격이지만, 탄저균 위협은 언제 가까이 올 지 모를 지속적 공포를 유발한다.
이 공포 또한 빈 라덴이 근원이라면, 그를 제거하는 테러와의 전쟁은 한층 절박한 인류적 과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탄저균 발원지를 빈 라덴과 북한과 이라크와 러시아로 종잡을 수 없이 몰고 간 추리와 보도는 탄저균 테러 위협이 미국 사회의 오랜 병리 현상이란 사실을 무시하거나 은폐했다.
마지막 통계가 나온 1999년 전 세계에서 보고된 실제 탄저균 협박 사건 83건 가운데 81건이 미국에서 발생했다.
거짓 위협은 일일이 헤아릴수 없어 닐 갤러허 FBI 안전국장은 "단 하루도 탄저균 협박 보고를 듣지 않는 날이 없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협박 대상에는 NBC와 워싱턴 포스트 등 언론사와 우체국, 정부 청사가 단골이었다.
플로리다 언론사에서 시작된 이번 탄저균 테러 소동은 비록 희생자가 생겼지만 과거 유형과 다르지 않다.
FBI도 발견된 실험실 수준 탄저균이 모두 미국에서만 배양되는 에이메스(Ames)변종이란 사실을 확인, 국내 극우세력이 인종 갈등을 조장하기 위해 벌인 범행쪽으로 수사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우습게도 이미 죽은 뉴욕 테러 용의자들의 지역 연고를 근거로 빈 라덴과 여러 국가를 지목한 숱한 주장과 보도는 처음부터 미신이었던 셈이다.
미신을 깨는 보도는 영국의 중립적권위지 인디펜던트 등에서 나오고 있다.
미국 언론은 여전히 허술한 이라크 배후설을 퍼뜨리고 우리 언론은 충성스레 따르고 있다. 진상이 분명해 질때쯤이면 미신은 빈 라덴 악마화와 전쟁 합리화의 역할을 다한 뒤 일 것이다.
비판과 자기 반성이 따르겠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한참 구른 다음이다. 러시아 언론이 미국의 석유 이권 등 중앙 아시아 장악을 우려하기 시작한 변화라도 제대로 살폈으면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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