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초, 유라시아 대륙의 양극단에서 거의 동시에 해양진출이 전개되었다.중국 명(明)의 환관 정화(鄭和)는 모두 일곱 차례의 ‘남해원정(南海遠征)’(1405~1433)을 단행하여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진출했는가 하면, 포르투갈은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점령하고 대서양의 카나리아 군도, 마데이라 섬, 아조레스 제도를 탐험하였다.
서로 상대를 모르면서 각기 아프리카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을 거쳐갔다. 1403년에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가 티무르에게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몽골 제국에 대한 경외심이 여전하기는 했지만 이제 분명 새로운 시대, 곧 ‘해양시대’의 서막이 열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행로는 양쪽이 달랐다. 중국은 해외진출을 포기하고 내부로 선회한 반면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은 탐험을 계속했다.
중국에게 그것이 종언이었다면, 후자에겐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리하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들이 벌어졌다. 포르투갈의 항해자들이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계속 내려가더니 드디어 디아스가 희망봉에 도달하고(1488)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양을 거쳐 인도에 도달하였다(1498).
콜럼부스가 네 차례의 항해를 통해 서인도제도를 발견하고(1492~1504) 마젤란이 세계를 일주하고(1519~1521)에스파냐는 1560년대에 이르러 태평양을 길들이는데 성공하였다.
왜 그러한 차이가 나타났을까? 흔히 유럽인들의 탐험심과 개척정신, 기독교전파라는 종교적 목적, 이베리아 반도라는 지리적 이점 등을 들먹거리지만 적절한 설명이 아니다.
설사 그랬더라도 왜 바로 이 시기에 그런 진출이 이뤄졌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유럽의 과학지식과 항해술을 강조하지만 이 역시 적절치 못하다.
당시 그것이 중국보다 더 낫지도 않았거니와 대서양바닷물의 흐름에 대한 지식이란 기실 필요의 산물일 뿐이다.
배에 대포를 장착한 무장선의 발명만은 분명 독보적인 것이었으나, 이는 인도양에서 이슬람선박에 대한 승리는 모를까, 진출 자체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또 다른 하나는 유럽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설명방식이다. 유럽이 경쟁적인 국가체제와 활력있는 사회구조를 가져서 그랬다는 것이다.
이 시기 유럽의 ‘국가간체제’야말로 남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중해 교역에 입각했던 당시 유럽 경제의 특수성과 근본적으로 물질문명의 ‘상대적 빈곤’이라는 요인이 더 중요하다. 결국 유럽은 해양진출을 계속해야 할 필요성이 중국보다 더 절실했다.
중세 이래 유럽은 물질적인 면에서 자가충족이 되지 않았다. 육류 중심의 식생활로, 풍미를 돋우는 ‘향신료’가 필요했지만 대부분을 외부에서 들여와야 했다.
원거리교역이 불가피했고, 이것이 중세유럽의 사회경제체제에 독특한 색조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 교역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수요과 공급을 이어주는 아랍상인들이었으며, 베네치아로 대표되는 지중해 교역은 동남아첸틔觀壙?유럽으로 이어지는 국제교역로의 부가물에 불과했다.
유럽은 모직물이라는 대응상품이있었지만 만성적인 무역역조를 메우기 위해 귀금속의 유출이 불가피했고, 그 결과 유럽은 언제나 화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유럽으로서는 이 사태를 돌파하기 위해서 두 가지 방안이 있었다. 하나는 중동을 장악하여 아랍상인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거나, 다른 하나는 동방으로 갈 수 있는 우회로를 찾는 것이었다.
‘십자군전쟁’을 시도했지만 힘의 역학관계상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전자가 불가능했다. 후자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러기에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이미 13세기 말에 인도로 가는 서쪽 항해로를 찾아 나섰으며, 15세기의 해양진출은 그 연장이었다.
특히 지중해 교역의 말단에 있었던 이베리아 반도는 베네치아의 자리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모든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해양진출은 유럽에 원하던 것을 주었다. 유럽은 역사상 처음으로 범세계적인 교역망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른바 ‘신대륙’을 차지했고 인도양을 통한 우회로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1650년경에 이르면 비록 전지구적인 차원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유럽 중심의 ‘세계체제’가 나타났다.
우선 유럽 내부에 중심부-반(半)주변부-주변부라는 독특한 경제적 위계가 나타났다.
잉글랜드의 동남부, 프랑스 북부와 저지대 지역, 이탈리아의 북부로 이루어진 중심부는 도시의 비중이 높고 자유노동에 입각하여 상품과 용역을 생산하고 수출하였다.
대부분의 유럽은 곡식 포도주 양모 목재와 같이 부피가 큰 일차원료를 반(半)종속노동을 통해 생산하고 수출하는 반주변부가 되었고, 시베리아가 모피를 공급하는 주변부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식민지인 서인도제도 및 중남미가 예속노동을 통해 본국에 부피가 작은 고가품(귀금속 모피 설탕 담배 향신료 등)을 공급하는 주변부로 편입되었다.
이미 이 시기부터 이 세계체제는 예속노동을 중심부로부터 주변부로 떠맡기고 있었으니, 본국에서 자유의 신장은 식민지인들의 종속을 대가로 한 값비싼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장에 유럽에게 기존의 범세계적인 경제질서를 뒤집어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게 해줄 만큼 강력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신대륙’은 유럽인들이 갖고 들어온 유행병으로 원주민이 거의 절멸했던 탓에 경제적으로 별로 수지맞는 것이 아니었다.
아프리카로부터 흑인들을 끌고 와서 노예로 만들어 대체 노동력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중남미의 식민지는 약탈적이었다.
반면에 동방교역은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이미 고도로 조직된 기존의 국가체제 앞에서 무력했던 유럽인들로서는 교역을 위한 권리와 거점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그러기에 ‘동인도회사’가 적절한 접근수단이 될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유럽은 여전히 동방, 특히 중국에 대한 무역역조를 뒤집어 엎을만한 매력적인 상품을 갖고 있지 못했다.
‘신대륙’이 생산한 막대한 은은 유럽을 거쳐 결국 차의 나라, 중국으로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중국은 ‘은의 무덤’이라는 영국 속담까지 생겨났다. 실론이 차의 대체생산지가 된 뒤에도 사태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국이 유럽에게 원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새로이 창출해야 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아편이며, 아편 유입을 막으려는 중국의 의지는 ‘아편전쟁(1840-42)’을 불렀다. 그리고 이때쯤이면 이미 유럽 중심의 세계체제는 완성된 뒤였다.
1492년은 멀리 보면 분명 유럽 중심의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럽이 명실상부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세 세기를, 정치적인 패권을 장악하기에는 그러고도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여기에서 동방교역, ‘신대륙’에서의 약탈과 노예무역을 통한 이득은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밑천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동방, 특히 중국은 자기완결적인 사회경제구조의 희생자가 되었다. -끝-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러 호텔 정전사태 방치 화려함속 후진성 '씁쓸'
코스모스호텔은 모스크바를 찾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묵는 특급호텔이다. 26층 높이에 객실이 1,800여개나 되고 통신시설도 아주 잘 되어 있어 외국의 비즈니스맨들이 많이 찾는다. 89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방문에 맞춰 우리 기업이 모피전을 연곳도 바로 이 호텔이다. 역사에세이팀도 이 호텔에 묵었다.
7월20일 밤,다음날 새벽 이탈리아 로마로 떠나려고 짐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정전이 되었다. 밤 10시30분.
일행 중 한 명은 그 시간 로비에서 정전사태를 맞았다.소파에 ?瞞? 기다리는데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어떻게 된 거냐"고 따져도 "모른다"는 대답 뿐이었다. 일류 호텔이라면 자가발전시설을 갖추어서 정전 자체가 없고,설사 정전이 되더라도 손님들을 안심시킨 뒤 손전등을 밝혀서라도 방으로 인도한다는 상식이 여기서는 통용되지 않았다.자정에야 불이 들어왔지만 물론 그때까지도 안내는 없었다.
모스크바는 맥도날드햄버거 등 다국적 업체와 가계의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서구의 여느 대도시와 다름없이 화려하다.그러나 호텔의 갑작스런 정전사태,손님을 어둠 속에 방치하는 무성의한 태도는 자본주의 서비스 정신이 살아있는 서구 대도시와는 분명 달랐다.외형을 들여오긴 쉽지만 시스템이 바뀌는 것은 그토록 힘든 것일까.
/박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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