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10월23일부터 13일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자주와 자유화의 기치를 내건 대규모 반소(反蘇)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헝가리 사태다.1953년 스탈린이죽고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이 시작되자, 동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탈스탈린 운동이 고개를 들었다.
이 운동은 자유민주주의 운동의 성격과 민족주의 운동의 성격을 겸하고 있었다. 폴란드에서는 1956년 6월에 포즈난에서 민중 폭동이 일어나, 4개월 뒤 소련이 달갑지 않게 생각하던 개혁파 민족 공산주의자 고무우카가 집권했다.
이 무렵 헝가리는‘작은 스탈린’이라는 별명의 라코시가 개혁을 거부하며 철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10월23일 학생과 지식인이 이끄는 대규모 시민 시위가 터지자 정부는 부분적인 민주화 조처를 약속했지만, 여론은 그 전 해에 수상 자리에서 해임된 개혁파 임레 너지의 복귀쪽으로 쏠렸다.
국민의 기세에 눌린 정부는일단 너지를 수상으로 임명하는 한편 소련에 군사 개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소 감정은 더욱 악화하며 민주화 요구는 더 거세졌다.
너지의 새 정부는이에 호응해 공산당의 일당 독재 제도를 폐지하고 다른 정당들과 함께 연립정권을 수립한 뒤,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와 동서 두 진영 사이의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소련은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해 헝가리 전역을 장악하고 정부에서 너지를 몰아낸 뒤 중도파 카다르에게 정권을 맡겼다.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에 피신했다가 신변의 안전을 보장 받고 대사관 밖으로 나왔으나, 소련군에 납치돼 1958년에 처형됐다.
너지 정부에서교육문화 장관을 맡았던 미학자 게오르그 루카치도 소련군의 헝가리 침략 뒤 체포돼 루마니아에서 감옥 생활을 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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