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달착륙에 맞먹는 인류 과학사의 한 지평이 열렸다.다국적 컨소시엄인 HGP(휴먼게놈프로젝트)와 셀레라가 인간 게놈 지도를 완성한 것이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 질병의 원인,나아가 진화의 신비까지 풀어줄 것으로 기대되는 게놈. 우리는 이제 막 생명의 비밀을 열기 위한 여행에 첫 발을 뗐다.
▼염기서열, 유전체 그리고 유전자
인간의 몸은 50조에서 10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각 세포 속에는 핵이 있으며 핵 속에는 23쌍의 염색체가 들어 있다.
이 염색체는 아데닌(A), 티아민(T) 구아닌(G), 사이토신(C)이라는 4개의 염기가 서로 얽힌 이중나선구조다.
유전자는 30억 쌍 염기서열 중 일부분으로, 전체 염기서열의 3%만이 유전자 영역으로 확인됐다.
즉 염기서열을 완성했다는 것은 4개염기가 어떤 식으로 얽혀 있는지 밝혀냈다는 의미이고 이는 유전자 연구 자체보다는 그 연구를 위한 ‘지도’라고 하는 것이 옳다.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유전자(gene)와 유전자가 위치한 염색체(chromosome)를 조합한 말이 유전체(genome)로서 유전자와 염기를 포괄하는 의미이다.
▼비밀은 단백질에 있다
생명의 비밀을 캐는 열쇠는 단순한 염색체의 배열차원을 넘어서 보다 복잡한 것으로 드러났다.
염기의 배열에 따라 유전자가 달라지고, 유전자에 따라 생성하는 단백질이 다르다.
유전자가 생명 현상에 필요한 단백질을 생산하는 과정을 ‘유전자 발현’이라 하는데 여기에 이상이 생기면 제때 죽도록 ‘프로그래밍’ 된 세포가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경우도 생긴다. 바로 암세포다. 알츠하이머 병도 15번 염색체에 위치한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발생한다.
그러나 아직 어떤 유전자가 무슨 단백질을 만들어내는지 알아낸 것은 전체의 5%에 불과하며, 하나의 질병에 수많은 유전자가 복합적인 기능을 하는 경우도 많아 질병의 비밀을 파헤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게놈 연구가 변화시킬 세상
유전자 치료는 특정 유전자에 이상이 발생했을 경우, 해당 유전자를 다른 생물에서 채취한 똑 같은 정상 유전자로 교체해 주는 것으로 질병 치료뿐 아니라 발생 가능성까지 차단한다.
아직 필요한 부분의 유전자만 정교하게 교체하는 ‘운반 시스템’이 완성되지 않아 실용화하지 못했지만 이 점은 몇 년 안에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 검사는 더 빨리 상용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암 검사의 경우 유전자에 암 발생 징후가 나타난 후 6년이 흘러야 판별이 가능했다.
그러나 유전자 검사는 이를 3년 정도로 단축할 수 있으며, 2003년 경에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암 발병 확률을 50~60%까지 예측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게놈 연구의 어두운 면도 있다. 인간복제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인간을 개량하거나 사전에 등급화하는 위험 등이 그것이다.
유네스코에서 지적한 바도 있듯 인류 생활에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균형있는 연구를 수행하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유향숙 박사는
한국형 게놈(유전체) 연구의 방향을 설정하고 모든 책임을 지는 사람.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장 유향숙 박사다. 21세기 들어 각광받는 '게놈'이라는 주제를 쥐고 있고 보기드문 여성과학자라는 프리미엄까지 붙어서 그를 원하는 곳이 많다. 유전체연구사업단 이외에도 대통령 자문 교육인적자원개발 위원,보건복지부 자문관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 약학대학 및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그는 화학물질 연구에 재미를 붙였고,1975년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전공을 분자생물학으로 바꾸었다.캘리포니아대학에서 유전자발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리=이진희기자river@hk.co.kr
■한국인 유전자 1만4,000개 데이터 베이스화
5월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이 한국인의 십이지장에서 분리해 해독한 위암의 원인균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의 염기서열은 미국, 일본에서 발견된 같은 종류 균주의 염기서열과 상당히 달랐다.
한국인의 질병은 나름의 독특한 유전자적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사업단이 목표로 하는 것도 바로 한국인의 질병 원인을 밝혀내는 것으로 약 1년 반의 기간 동안 1만 4,000여 개에 이르는 유전자를 찾아내 데이터 베이스화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중1,000여 개는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유전자로서 사업단에서 연구권리를 갖고 있다. 사업단은 곧 등록번호를 부여해 외부 연구자들도 사업단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해당 데이터베이스를 볼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또 한국인 유전자뿐 아니라 자생식물사업단에서 국내 고유의 자생식물의 게놈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국내 해양생물이나 한국 음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효모 등의 염기서열을 밝히는 작업도 한창이다.
특히 이미 산업적 효용성을 인정 받은 유산균이나 젖산균의 게놈 연구에서 각국이 성과를 내고 있지만 결과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국내도 김치유산균이나 인삼의 게놈 분석 등을 진행하며 유전자 ‘금광찾기’ 경쟁에 뛰어든 상태다.
■사이언스 어드벤처 종착 / 신비한…광활한…탐험 대단원
머리카락 굵기보다도 작은 나노의 세계부터 광활한 우주의 비밀까지, 그리고 유전자의 비밀부터 인간 복제의 가능성까지….
무궁무진한 과학의 세계를 탐험한 한국일보의 월례 과학강연 ‘사이언스 어드벤처 21’이 20일 12번째 강연을 끝으로 1년 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2000년 11월 18일 ‘우주의 나이는 몇 살인가’를 주제로 시작된 강연회는 과학에 대한 대중의 목마름을 채워주었다.
서울을 비롯해 대구, 대전, 광주, 포항 등을 돌아가며 열린 강연은 일반인이 보다 가까이서 과학을 접하는 기회가 됐다.
‘우주선과 로켓’ ‘인공위성’ ‘마이크로 로봇’과 같은 대중적 주제뿐만 아니라 ‘생명복제’처럼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과학계 이슈, 2000년 존재가 입증되며 우주과학자를 흥분시킨 ‘진공에너지’나올 초 마무리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처럼 첨단 과학적 성과, 인간사회에 대해 성찰하게 한 ‘개미의 사회’등….
과학강연은 폭넓은 주제를 다루면서 전공학도뿐만 아니라 초ㆍ중ㆍ고학생,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과학에 관심있는 다양한 계층의 관심을 수용했다. 매회 강연장을 메운 수 백 명의 청중을 통해 과학 대중화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의 과학 지성을 대표하는 12인의 강연자는 과학지식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청중과의 대화를 통해 동료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다가가면서 과학자와 대중 간의 신뢰를쌓아갔다.
난해한 수식과 전문용어의 틀에 갇혀 죽은 지식이나 다름없던 과학은 이들을 통해 산 지식으로 탈바꿈했다.
e-메일 주소와 사인을 받아가는 청중의 열의에 놀란 것은 오히려 과학자들이었다. 최근 연구동향을 소개하면서도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날카로운 질문에 당혹스러워하기도 했다.
과학자와 청중은 ‘과학은 실험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에 동의했다.
김정욱 고등과학원장은 “우리의 과학자들은 대중에게 쉽게 과학을 이야기하는 데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마지막 회 강연을 한 유향숙 인간유전체사업단장은 “과학연구의 성과가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과학자의 중요한 임무다. 과학을 주제로 대중과 대화하는 것이 연구실에서의 연구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이언스 어드벤처 21’의 끝을 말하기에는 이르다. 아직 탐험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 더 깊숙이 탐험해야 할 곳이 우리 앞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강연장에서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깨알처럼 메모를 하던 미래의 과학자들과 이 강연회가 초석을 놓은 과학 대중화에게 맡겨진 중요한 몫이기도 하다.
/문향란기자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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