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한일정상회담을 계기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에 따른 문화개방 무기연기 등의 보복조치를 단계적으로 철회키로 한 것으로 알려지자 반대여론이 뜨겁다.한편에서는 "이제 일본과 대화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하지만 일각에서는 "회담에서 얻은 것도 없는데 먼저 족쇄를 푸는 것은 외교적 무능"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찬성-이숙종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정부가 희망하던 관계복원이 시작되었다. 일본 총리가 서대문 독립공원을 둘러보고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전달했지만 앞서 진실한 사죄의 마음을 담았다고는 평가 받지 못했다.
또한 한일관계를 경색시켰던 현안에 대해서도 역사공동연구기구 설치, 전몰자 참배 대안방안 검토, 고위외교 당국간 꽁치협의 추진이라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회담 바로 다음날인 16일, 정부는 일본 정부가 역사교과서 재수정 요구를 거부한데 대한 일련의 대일 보복조치를 단계적으로 철회할 방침인 것으로 보도됐다.
타이밍에 무리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한일 관계정상화의 길을 가는 것은 타당한 방향이라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번 관계정상화는 정부간 외교관계의 정상화에 한하는 것이다.
즉, 한국 민심의 정상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는 일본의 성의 있는 향후 조치들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갈등 현안을 협상하고, 공동으로 주최하는 월드컵의 성공과 경제및 안보상의 협력을 위해 더 이상 정부간 대화를 단절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한일관계를 경색시킨 원인은 정부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역사인식의 문제였다.
역사인식의 문제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정신세계와 결부되는 것으로 한국측이 상대방을 도덕적으로 정죄하고 다그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더욱이 정부가 역사문제를 해결하려 들면 국내 여론의 볼모가 되어 그 해결이 지난해 진다. 즉, 한국 정부는 반일여론을 의식해 강경노선을 유지해야 하며, 일본 정부는 보수우익여론을 의식해 전향적 입장을 취하기 어렵다.
따라서 역사인식의 격차는 한일 양국 시민사회의 교류 활성화와 유엔 인권위원회나 유네스코와 같은 국제기구의 관여를 통해 서서히 좁혀나갈 수밖에 없다.
셋째, 역사문제는 이제 우리 정부의 대일외교 카드로서의 실효성을 잃었다.
일본 정계가 전후세대로 교체되면서 침략과 패전의 역사를 합리화시키려하고 있다. 우경화로 일컬어지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 '과거사'라는 카드는 일본에게 압력을 주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카드를 새롭게 찾아내야 한다. 한국의 협력이 긴요한 부분에서부터 탐색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대화를 해야 한다.
■반대-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고이즈미 총리의 방한을 통해 한국정부가 얻은 게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가 방한을 강행했을 때는 그에 따른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언론에 공개된 내용만으로 볼 때 고이즈미의 '보따리'는 사실상 비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한국민의 대일감정을 더욱 악화시키고 한국정부의 외교적 무능을 확인시켜 주는 결과다.
그가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과거의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한 발언은 결코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서로 반성하고 협조하자'는 따위의 '의도된 실언'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다만 그가 사과를 뒷받침할 만한 약속을 했는가이다.
한국정부가 소리 높여 주장한 교과서 왜곡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했는가. 식민지배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그 유족에게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했는가.
심지어 야스꾸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조선인 영혼조차 궁색한 이유를 들어 반환하지 않고 있다.
사과란 실천을 전제로 했을 때 비로소 설득력을 갖는다. 고이즈미총리는 이번 방한에서 그 어느 것도 약속한 것이없다. 애초부터 약속할 의사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주장하듯 '진전된 발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문제의 핵심은 한국정부의 외교적 무능과 무원칙에 있다.
불과 몇 달 전 한국정부는 일본교과서의 시정을 촉구하며 대일 강경노선을 천명했다. 시정할 때까지 대일문화개방을 연기하겠다는 등의 극단적인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총리를 받아들였다. 자신이 내뱉은 주장을 헌신짝 처럼 버려버렸다. 이렇게 쉽게 변할 정책이었다면 애당초 하지 않는 것만 못했다.
결국 교과서 문제를 둘러싼 정부의 대일 발언은 '국내용'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한국외교의 고질적 병폐인 무원칙과 무능력이 이번 교과서왜곡과 고이즈미 총리의 방한에서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최소한 대북정책에서 취하는 자세의 10분의 1만이라도 대일관계에서 유지한다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화개방과 교류를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정부가 자신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정책의 안정과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도 기다려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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