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내가 50여년 만에 처음 만나는 한국 여자입니다."4년여 전 캄보디아 프놈펜의 허름한 호텔 방에서 처음 만난 '훈할머니'가 기자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우리 말을 전혀 못하는데다 머리를 짧게 잘라 순간, "정말 한국인일까?"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후 취재과정에서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가슴 속 깊이 파고들었던 이 한마디 때문일 것이다.
훈 할머니는 당시 72세였고 한국 이름은 이남이였다. 열 일곱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 이국 땅에 발이 묶인 훈 할머니의 사연을 한국일보가 특종 보도한 1997년 6월14일, 기자는 바로 프놈펜으로 날아갔다. 다른 언론사들도 잇달아 기자를 파견했다.
마감에 쫓긴 기자들이 "하루에 몇 번이나 성 관계를 했느냐"는 식의 질문을 해대자 영어로 통역을 해주던 현지인이 여자인 기자를 불러 "너무 무례하지 않느냐"고 따져 이를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렇게 가까워진 통역자의 도움으로 공식기자회견 외에 새벽이나 밤 늦게 할머니를 따로 만나 은밀히 취재할 기회도 갖게 됐다.
함께 하룻밤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얼굴만 쳐다보다 궁리 끝에 맥주병 뚜껑으로 '공기놀이'를 해보이자 능숙한 솜씨로 따라 하고는 "하하" 소리내어 웃던 할머니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뒤 할머니를 한국으로 초청, 가족을 찾기까지는 숱한 고비를 넘겨야 했다. 엉뚱한 이들을 놓고 '가족을 찾았다'는 오보도 나왔고 , 일부 언론이 '한국인이 아니다', '사기극이다'라는 기사를 쓰는 통에 "특종에 눈이 어두워 '소설'을 쓴 여기자"로 비난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8월29일 드디어 가족을 찾았다. 한국일보 취재단은 물론, 당시 15세로 능숙한 캄보디아어로 통역을 한 프놈펜 교민 여학생, 할머니의 증언 채록을 담당한 정신대문제연구소 관계자들, 여러 지방신문사 취재진 등 할머니의 '진실'을 끝까지 믿은 사람 모두의 합작품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캄보디아로 돌아갔다가 올 2월16일세상을 떴다. 유해도 본인 뜻에 따라 정신적 위안처였던 그 곳 절에 안치됐다.
고국서 가족을 찾은 뒤 가난한 캄보디아 현지 가족들 사이에 분란이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과연 내가 한 일이 잘한 일이었을까" 라는 회의도 들었다. 솔직히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부처님에 의지해 심난한 삶을 버텨냈던 할머니가 이승의 아픈 기억과 인연의 짐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 떠났기를 바랄 뿐이다.
이희정국제부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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