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본지 5면에 매일 쓰는 칼럼 '오늘속으로'의 10월9일치 '한글날'은 독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비판의 줄기는 그 칼럼이 한글을 모욕했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그 칼럼이 한글을 모욕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한글날 아침에 나간 글이 한글의 적극적 가치를 덮어두고 소극적 가치를 주로 드러낸 점은 비판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욕설에 가까운 비난까지를 포함해서 그 칼럼에 쏟아진 비판을 달게 받겠다. 생일 잔치에 들른 불청객이 호곡을 한 셈이니 욕먹을 만하다.
그러나 그런 비판을 하신 분들 못지않게 기자도 한글을 자랑스러워한다는 점은 밝히고 싶다.
자신의 책을 거론해 민망하지만, 기자가 지난 1999년에 낸 '언문세설(諺文細說)'은 그런 흐뭇함의 소산이다.
표제의 '언문'이라는말 때문에 혹 선입견을 가질 독자도 있으시겠지만, 거기서 '언문'은 우리 문자를 그렇게 얕잡아 부르던 사람들에 대한 야유다.
그 책에 흘끗 눈길을 주신 분이라면, 기자와 한글 사이의 정분이 치정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리셨으리라 믿는다.
말하자면 10월9일치 칼럼은 생일을 맞은 연인에게 부린 투정에 가까웠다. 그러나 생일상 앞의 투정 때문에 많은 분의 질책을 들었으니, 생일이 좀지나긴 했지만 오늘은 축가를 부르고 싶다.
비판 받은 칼럼에서도 적었듯, 한글의 우수성은 특히 그 제자(製字) 원리에 있다. 한글의 제자원리는 얼마나 우수한가?
훈민정음 연구로 학위를 받은 미국 컬럼비아 대학 동아시아학 교수 게리 레드야드는 그 학위 논문에서 이렇게 찬탄했다.
“글자 모양과 기능을 관련시킨다는착상과 그 착상을 실현한 방식에 정녕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유구하고 다양한 문자의 역사에서 그런 일은 있어본 적이 없다. 소리 종류에 따라 글자모양을 체계화한 것만해도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그 글자 모양 자체가 그 소리와 관련된 조음 기관을 본뜬 것이라니. 이것은 견줄 데 없는 언어학적 호사다.”
레드야드가 지적했듯, 한글의 닿소리글자들은 조음 기관을 본떴다.
예컨대 ㄱ 과 ㄴ 은 이 글자들이 나타내는 소리를 낼 때 혀가 놓이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ㅁ 은 입모양을 본뜬 것이고, ㅅ 은 이 모양을 본뜬 것이며, o 은 목구멍을 본뜬 것이다.
조음기관의 생김새를 본떠 글자를 만든다는 착상은 참으로 놀랍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리 종류에 따라 글자 모양을 체계화'했다는 레드야드의 말은 무슨 뜻인가?
조음 기관을 본뜬 기본 글자 다섯(ㄱ, ㄴ, ㅁ,ㅅ, ㅇ)에다 획을 더함으로써, 소리나는 곳은 같되 자질(소리바탕)이 다른 새 글자들을 만들어냈다는 뜻이다.
예컨대 연구개음(어금닛소리) 글자인ㄱ 에 획을 더해 같은 연구개음이되 유기음(거센소리) 글자인 ㅋ 을 만들고, 양순음(입술소리) 글자인 ㅁ 에 획을 차례로 더해 같은 양순음이되 새로운 자질이 더해진 ㅂ 과 ㅍ 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로마 문자와 비교해보면 한글에 함축된 음운학 지식이 얼마나 깊고 정교한지 금방 드러난다.
예컨대 이나 잇몸에 혀를 댔다 떼면서 내는 소리들을 로마문자로는 N, D,T로 표시하지만, 이 글자들 사이에는 형태적 유사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한글은 이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글자를 ㄴ, ㄷ, ㅌ 처럼 형태적으로 비슷하게 계열화함으로써, 이 소리들이 비록 자질은 다르지만 나는 곳이 같다는 것을 한 눈에 보여준다.
즉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음소 단위의 분석에서더 나아가, 현대 언어학자들처럼 음소를 다시 자질로 나눌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은 한글을 로마문자 같은 음소문자보다 더 나아간 자질문자라고 불렀다. 언어학적 호사의 극치라는 레드야드의 찬탄은 과장이 아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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