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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재연프로그램 대역 배우…알아주지 않아도 연기인생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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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재연프로그램 대역 배우…알아주지 않아도 연기인생을 간다

입력
2001.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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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짙게 깔렸다. 15일 밤 11시 인천 남구 도화동 한 여관에 10여 명이 모였다. 배우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여관방 구석에서 각자 분장을 한다. 스산한 가을 날씨의 냉기만이 여관방을 메우고 있다.이들은 경인방송(iTV)의 재연 다큐멘터리 ‘실제상황-위험한 변신’ 편에 출연하러 온 대역 배우들이다.

사건 속의 인물이나 화제의 인물 등 실제 인물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대역배우들. 그들의 삶은 자신이 대역을 맡은 범죄자나 스타나 성공한 기업인의 인생과는 무관하다.

단돈 10만 원을 쥐고 5~10시간 기다리며 대사하나 더 하려고 애쓰는 모습, 언젠가는 내 인생을 대역해 줄 배우가 생길 정도로 유명해지는 꿈만이 있을 뿐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대역 배우들은 방송가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존재다.

KBS ‘이것이 인생이다’ ‘TV는 사랑을 싣고’, MBC ‘우리시대’ ‘성공시대’ , SBS ‘별난행운, 인생 대역전’ ‘터닝 포인트-사랑과 이별’ , iTV ‘실제상황’ ‘경찰 24시’ 등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형식을 빌린 재연 프로그램은 20여 개에 이른다.

점차 증가 추세이다. 이 프로그램을 꾸미고 전개해가는 사람이 바로 대역 배우들이다.

SBS ‘별난 행운…’의 유진규 PD는 “재연프로그램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방송 내용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실제 인물 등과 유사한 대역 연기자들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고 말했다.

하지만 중요성에 비해 그들에 대한 처우는 형편없다.

일반 연기자는 등급에 따라 출연료를 받지만 대역 배우들은 등급이 없다. 거의 일당 개념으로 하루 5만~20만 원을 받는다.

"대역 연기만 해 가지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일반 드라마의 엑스트라로 출연한다. 며칠 전 모방송사 조연출자가 대사가 몇 마디 있는 연기를 해달라고 해 신경을 쓰고 가슴 설레며 밤 12시 현장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대사가 없어졌다고 해 행인 역할만 하고 돌아왔다.

이처럼 현장에서 무시당하기 일쑤다"는 정모(45)씨의 하소연은 대역 배우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대역배우들에 대한 TV와 일반의 무관심은 사회의 스타 만능주의를 말해준다. 그래도 이들은 "몇마디 대사만 있어도 좋다. 연기할 프로그램만 있다면 기꺼이 출연한다"고 말한다. 촬영장에서의 대역배우들. /TV 촬영

이런 낮은 관심과 대우는 재연 프로그램의 질의 저하로 이어진다. 대역 배우도 엄연한 전문직이지만 생계 때문에 대역 배우들이 감소해 대사전달이나 연기의 기본조차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프로그램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대역 배우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고 생계를 보장해주는 외국과 크게 다른 상황이다.

대역 배우들은 출신도 다양하다. 연극계에 몸담았다가 생활이 어려워 방송가에 나온 사람, 탤런트로 출발했다가 캐스팅이 안 된 사람, 보조 연기자 출신, 무턱대고 연기가 하고 싶어 방송에 얼굴 한 번 내밀려고 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다. 현재 대역 배우는 500여 명.

대역 배우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 사회의 스타 만능주의를 역으로 말해준다.

이화여대 언론영상홍보학부 주철환 교수는 "대역이나 단역 배우들에 대한 낮은 처우와 일반인의 무관심은 스타 위주의 대중문화, 더 나아가서는 권력층을 비롯한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만을 갖는 우리 사회의 병폐와 맥을 함께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기만 있으면 드라마 회당 출연료가 500만~700만 원 선에 이르고 특별 분장실을 설치하는 등 엄청난 대우와 정성을 기울인다.

그래서 탄탄한 연기의 기본기보다는 이미지나 스캔들 조작을 통해 한 번에 스타가 되려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이는 척박한 대중문화 풍토를 조성한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대우 받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탕주의만이 있을 뿐이다.

대역 배우들은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방송사로 발길을 향하고 있다. 대역 배우 정일도(38)씨는 며칠 전 지하철을 탔다가 지하철 수사대에 체포돼 수갑을 차는 봉변을 당했다.

그가 ‘공개수배, 사건25시’(KBS)와 ‘경찰 24시’(iTV) 등에 범죄자로 출연해 승객 중 한 사람이실제 범인으로 오인해 경찰에 신고해 일어난 해프닝이다.

복권에 당첨돼 돈을 벌었다는 사람 이야기에 출연한 대역 연기자는 돈 좀 빌려달라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다.

이런 일은 대역 배우들에게 흔한 일이다. 하지만 대역 배우들은 이런 관심이 싫지않다. 연기하는 자신을 브라운관에서 봤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 에 출연해 몇 마디 대사를 하고 촬영장을 떠나는 변신호(29)씨. “나도 번듯한 연기를 하고 싶다” 는 그의 말은 대역 배우들의 존재의미이자 이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희망이다.

외국에서 연기력을 갖춘 대역 배우를 드라마에 자주 기용하는 것과 달리 우리 방송사에선 이들에게 출연기회를 거의 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역 배우들에게는 한결 같은 희망이 있다. 아무리 하찮은 배역이라도 고정 캐릭터를 맡아 지속적으로 연기를 하는 것이다.

MBC 아침 드라마 ‘보고 싶은 얼굴’에서 주인공 독고영재집의 파출부로 나오는 김영희(39)씨는 대역 배우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연기자가 꿈이었던 그는 10여 년 간 재연 프로그램에 출연하다 근래 들어 일반드라마와 시트콤 등에 파출부나 동네 아낙네 등 고정 배역을 맡아 지속적으로 시청자와 만나기 때문이다.

대역 배우 출신중 시청자의 눈길을 끄는 연기자도 있다.

‘가을 동화’에서 어린 송혜교 역을 하고 ‘명성황후’ 에서 어린 명성황후 역을 소화한 문근영(14)양과 요즘 인기가 있는 SBS ‘여인천하’에서 복성군 역을 하고 있는 오승윤(11)군은 ‘TV는 사랑을 싣고’ 에 10여 차례 이상 출연한 대역 연기자 출신이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20년째 대역배우 정종현씨

부푼 가슴을 안고 대사를 되뇌이며 SBS 탄현 스튜디오로 향한다. 비록 보조연기이지만 아침 드라마 ‘외출’ 에 출연해 한 페이지에 달하는 연기를 하기 때문이다.

20여 년째 대역 배우 생활을 하며 요즘 iTV ‘위험한 초대-미스터리극장’ , MBC ‘성공시대’ 등 5개의 재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정종현(41)씨.

그도 다른 대역 배우들처럼 연기를 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엘칸토 극단에서 연극 배우로 데뷔했다. 그러나 생계가 힘들어 옷 장사 등을 하다 동료의 권유로 대역 배우를하게 됐다.”

정씨는 “사람들의 관심이 없더라도 연기를 할 수 있는 재연 프로그램이 많다면 좋겠다. 일이 없어 집에 있다 보면 두 아이와 아내에게 면목이없다. 일이 있으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범죄자나 문제 있는 사람의 대역을 맡는 아버지를 TV를 통해 만나면 불만도 늘어놓을 법한 아이들이 푸념 대신 용돈을 아껴 일 나가는 아버지에게 교통비를 줄 때 너무 가슴이 아프다는 그는 “사회와시청자, 방송사에서 대역 배우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더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고말했다.

가공의 내용을 연기로 표현하는 것과 달리 사실성이 생명인 재연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의 연기는 실제 주인공의 성격과 행동을 그대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일상적인 연기를 해야 하고 프로그램마다 완벽한 변신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내 자신 연기자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대역 배우로 끝나더라도 연기를 했다는 자부심 때문에 현재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정씨는 말했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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