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데카브리스트 광장에는 막 대지를 박차고 달려 나아가려는 순간의 기마인을 표현한 동상이 있다.이 도시의 건설자,표트르 대제(1682-1725)의 기념상인 ‘청동의 기사’이다.
말도 사람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기세의 이 동상을 대할 때마다 나는 (물론 이 동상 자체를 소재로 한 푸쉬킨의 시도 있기는 하지만) 김지하의 시 ‘기마상’을 떠올리곤 했다.
암울한 긴급조치 시절 저항시인 김지하가 쓴 작품과 러시아의 전제군주 예카테리나 2세가 선대의 전제군주에게 바친 동상을 겹쳐보기 하는 것은 같은 제목만으로 조건반사를 일으키는 피상적 연상능력 때문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게다. 시는 민중의 저항적 영웅주의를 노래하려 한 것일 테고 동상은 정복군주의 패권적 영웅주의를 표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두 기마상은 인간의 엄청난 정치적 에너지의 응축과 그것이 막 폭발해 나오려는 숨막히는 순간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닮았다.
한국의 시인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예감하고 있다면, 데카브리스트 광장에서 도약하는 청동의 기사가 선포하고 있는 것은 ‘제국의 탄생’이다.
몽골 지배를 극복하고 타타르 잔여세력도 대부분 흡수한 후 러시아인들은 “육로를 통한 연속적 팽창”이라는 방식에 따라 끝없이 동진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정복하고, 중국과 접경하고, 나선정벌을 계기로 조선인들과도 조우했으며, 17세기에 이미 세계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게 되었다.
서남쪽으로는 몽골 지배 이후 떨어져 나갔던 우크라이나의 상당부분도 다시 차지했다. 하지만 사회의 질적 변화는 거의 없었다.
이 나라가 계승한 비잔티움 문화는 근대적 학문, 행정·군사체계, 기술의 발전을 촉진할 수 없었다. 러시아 고유의 사회문화적 역량도 대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시선을 서쪽으로 돌리고, 러시아를 유럽열강의 일원으로 만든 것이 표트르 대제였다. 표트르의 치세는 영토확장과 흔히 ‘서구화’ 정책이라 불리는 일련의 개혁을 특징으로 한다. 7척 장신에 엄청난 에너지를 가졌던 그는 ‘병사왕’(兵士王)의 전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왕궁의 화려함보다 병정놀이를 더 좋아했으며, 전쟁 중에는 병사들과 함께 야전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군사전문가로서 표트르의 특별한 관심은 육군 상비군과 해군의 창설ㆍ강화에 있었다. 러시아의 영토팽창은 그때까지 육상 병력에만 의존해 왔지만그는 바다 없는 대국이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러시아의 함대는 그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했다.
해군의 창설자 표트르 대제를 기리는 기념물은 러시아 곳곳에 있지만 우리 일행이 특별히 시간을 내서 찾아본 것은옛 도시 페레슬라블 잘레스키에 있는 ‘보틱(작은 배)’ 박물관이었다.
야로슬라블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이 자그마한 박물관은 플레세예보 호숫가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있었다.
한여름 대낮의 햇살 아래 언덕을 올라가 보니 전시물은 사실상 단 하나, 표트르가 열 여섯 살 소년 시절에 만들었다는, 길이 10m가 안돼 보이는 참나무 보트였다.
그러나 이 배야말로 러시아 역사에서 범상치 않은 의미를 가진다. 우연히 황실 창고에서 영국산 폐선한 척을 발견하고서, 이 영국 배는 순풍에만 나아가는 러시아 배들과 달리 역풍에도 항해할 수 있다는 설명에 경악한 소년 차르는 배와 서구문물에 대해 운명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도 똑같은 배를 만들어보기를 고집하여, 울창한 숲과 풍부한 물이 갖춰진 이 호숫가에서 배 제작에 몰두했고 몇 척의 작은 배를 직접 만들어 진수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지금껏 남은 것이 이 ‘포르투나’(행운의 여신)호라고 한다. 그가 후일 네덜란드에 가서 신분을 숨긴 채 조선술을 익혔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권력기반의 확립 후 표트르가 매달린 일은 바다로의 진출과 서양문물의 도입이었다.
남쪽에서는 아조프해로의 출구를 얻었고 _ 후일 크림한국을 정복하고 흑해로의 출구를 정식으로 차지하는 것은 예카테리나 2세였다.
북쪽에서는 대북방(大北方)전쟁에서 스웨덴에 승리함으로써 발트해로의 진출에 성공하였다. 원로원은 이 승리를 치하하여 1721년그에게 기존의 비잔티움식 칭호인 차르에 덧붙여 임페라토르(황제)라는 로마식 칭호를 바쳤다. 그는 이제 비잔티움도 몽골제국도 아닌 고대로마의 통치자를 계승하고자 하였다.
페테르부르그는 표트르의 이같은 서방지향성의 창조물이었다. 그는 핀란드만 물가의 허허벌판에 자신의 도시를 건설하고 수도를 이리로 옮기라고 명했다.
“유럽으로 난 창”을 열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1703년 러시아인들은 200년 이상 계속될 새로운 수도를 가지게 되었다.
모스크바가 전통적, 동방적 러시아를 대표한다면 페테르부르그는 근대적, 서구적 러시아의 상징공간이다.
모스크바 일대에서 꼬불꼬불한 장식물이 겹쳐진 목조건물이나 알록달록한 색깔의 돔이 여럿 달린 교회건물들을 둘러보며 러시아 건축의 독자성을 확인했을 관찰자는 이 곳에서는 18~19세기 서구식 석조건물들이 가지런히 늘어선 정비된 계획도시를 목격하게 된다. 전혀 다른 러시아가 서북쪽 끝에 응축되어 있다.
표트르는 이념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군사, 행정, 교육,재정제도, 의복 등 모든 분야에서 서구화 개혁을 단행했지만 그의 주된관심은 서구의 근대적 인간형이 아니라 서구의 문물에 있었다.
세계관의 변화없이 세계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그가 수구세력의 중심이던 황태자 알렉세이를 죽이면서까지 집요하게 추진했던 서구화정책의 주된 목표는 부국강병이었다.
그는 권력인으로서 목표를 향해 돌진했고, 그의 사후에도 러시아의 영토확장은 계속되었다. 흑해 북쪽 연안,카프카즈 산맥일대, 중앙아시아가 속속 제국 판도 안에 들어와, 유럽과 아시아의 수많은 민족, 문화, 종교가 공존하게 되었다.
비잔티움에서 제국의 이념을 이어받고 몽골제국을 통해 제국권력의 실제를 경험했던 러시아는 18세기초에 이르러 스스로 제국이 되었다.
제국은 군사력만으로는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다. 제국 중심부가 스스로 이념적 지도성, 문화적 감화력을 가지는 경우에만 포섭된 민족들이 그 지배를 받아들인다.
전제군주정은 그 자체가 제정 러시아의 이념 가운데 하나였고 정교회가 이를 뒷받침했다. 제정의 붕괴와 함께 영토상실이 있었으나 소련 정권은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지표 아래 제정시대 영토를 거의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사회주의 이념이 통합력을 잃으면서 제국의 진정한 와해가 시작되었다.
이제 러시아 연방은 또다시 과거 볼셰비키 혁명 직후 남겨졌던 영토만을 차지한 채, 길을 찾고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러시아가 유럽도 아시아도 아니고 오로지 러시아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러시아의 특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흔히 “모든 것이 공존하는 유라시아 국가”라는 말로 답한다.
그러나 이는 공간과 구성요소만을 가리킬 뿐, 체제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규정해 주지 않는다.
페테르부르그의 기품있되 퇴락한 건물들 앞에서 “러시아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이 나라 지식인들의 물음을 뇌어 본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상트 페테르부르크 '네프스키 대로'
작가 고골리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표현한 네프스키 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에도 등장하는 이 거리는 옛 해군청에서 알렉산드로니예프스키수도원으로 이어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중심도로이다.
길이 4.5㎞, 최대 너비 60㎙인 이 도로에는 옛 러시아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가 응축돼있다.
양 옆으로 정부기관과 옛 궁전, 상점, 박물관, 교회 등이 줄을 서 있다. 이들 건물은 대부분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초에 이탈리아 러시아 건축가들이 설계한 바로크 건물들. 황금빛 첨탑으로 유명한 옛 해군청 건물 앞에는 ‘12월에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란뜻의 데카브리스트광장이 펼쳐져 있다. 1825년 전제정치와 농노제에 반대한 젊은 귀족들이 혁명을 시도했던 곳이다.또 1811년 완공된 카잔성당은 대형 돌기둥과 화려한 대리석 바닥, 정교한 벽면 부조가 특히 유명하다. 소비에트시대에는 무신론을 선전하기 위한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네프스키 대로에는 지금도 문화가 흐른다. 거리 뒷편으로는 벼룩시장이 펼쳐져 있고 서점과 화랑도 곳곳에 있다.
무명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리라며 행인을 붙잡는다. 거리 곳곳에서는 즉석 공연이 펼쳐진다.
길 옆 운하에는 네바강으로나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한번 둘러볼 수 있는 유람선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이 거리는 늘 관광객들로 붐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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