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9년 10월17일 폴란드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프레데릭 쇼팽이 파리에서 작고했다. 39세였다. 쇼팽의 유해는 2주 후인 10월30일 파리의 페르라세즈 묘지에 묻혔다.그가 고향 바르샤바를 떠날 때 가져온 조국의 흙이그의 유해 위에 뿌려졌다.
쇼팽은 바르샤바 육군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프랑스인 니콜라 쇼팽과 폴란드귀족 출신인 유스티나 크지노프스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8살에 처음으로 대중 콘서트를 연 그는 중학교 재학 중에 러시아황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정도로 이 악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쇼팽은 20살인 1930년에 조국을 떠난 뒤 프랑스를 비롯해서 외국을 떠돌다 객사했다.
그 해에 폴란드에서 일어난 혁명을 그 이듬해 러시아군이 압살하자 암울한 조국으로 발길을 돌리기가 싫었던 듯하다.
쇼팽의 에튀드(연습곡집ㆍ작품번호 10) 가운데 제12곡 C단조는 흔히 ‘혁명 에튀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격정적인 피아노 독주곡은 조국의 혁명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독일에서 듣고 만든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쇼팽의 작품은 가곡에서 첼로소나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걸쳐 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200곡 가량의 피아노곡이다.
페달을 사용해서 음색의 종류를 늘리고 템포 루바토(임의의 템포)를 통해 연주자의 재량을 늘리는 등 그자신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그는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드뷔시 같은 동료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며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렸다.
그의 이름을 딴 쇼팽 국제 피아노콩쿠르가 1927년부터 5년마다 바르샤바에서 열리고 있다. 쇼팽은 독신으로 죽었지만, 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애인은 소설가 조르주 상드였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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