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2월 17일, 독일 뉘른베르크게르만 국립박물관은 2001년 6월로 계획되었던 구동독 출신 대화가 빌리 지테의 전시회 ‘화가 지테, 그의 작품과 기록들’을 전격 취소했다.구동독 출신 3대 화가 중 하나인 올해 80세의 지테는 1974년부터 1988년까지 구동독미술협회장을 지낸 동독 미술계 거장이다. 동베를린 민족궁전의 장엄한 이카로스 연작 벽화의 제작자로 유명하다.
구동독 미술계 3대 거장이란 동독의 벨라스케스로 불리우는 베르너 튀브케, 베른하르트 하이시히, 그리고 빌리 지테이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동독 미술의 독보적 회화전통을 자랑하는 라이프치히 학파들이다. 지난 두 해 동안 전시회를 위해 화가 지테와 박물관측이 쏟았던 시간과 협력은 진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문득 바이에른주 문화장관을 포함한, 30명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위원회는 투표를 통해 그의 전시회를 전격 취소해버린 것이다.
박물관측은 화가 지테의 ‘동독 독재 아래서의 정치성’을 문제 삼고 나왔다. 그들은 도시 뉘른베르크가 2차 세계대전 후 역사적인 전범자 재판이 열렸던 곳이며, 그 박물관이 독일최대의 문화역사박물관임을 상기시켰다.
여기 ‘역사’라는 말이 특히 운명적이다. 그들은 이 역사라는 추상적 가치에 의지해 “우리는 연구기관이지 단지 그림만 내다 거는 전시창고가 아니다”라고까지 발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충격적 기습에 대한 노화가 지테의 반응은 짧고 예언적이었다. 그는 말했다. “통일 10년 후 통일독일이 내 지하실의 시체를 문제 삼고 있다.”
내 지하실의 시체. 지테의 이 말속에선 구동독 예술가들의 통증이 느껴진다.
그것은 동독 예술인들과 구동독 정권과의 관계, 그것이 과연 생존을 위한 불안한 동맹관계였는가 아니면 악마적 공범관계였는 가에 대한 뼈아픈 물음이기 때문이다.
‘지테 충격’으로 불리우는 이 사건은 전 독일 예술인들에게 심각한 논쟁을 일으켰다. 독일 신문들은 대뜸 “지테 전시회의 전격 취소는 구동독 미술에 대한 통일독일의 검열인가?”라고 격한 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화가 지테가 구동독 시절 이미서독 서베를린 국립미술관에 초대되어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으며 당시 이미 이념을 초월한 독자적 언어를 지닌 표현력의 거장으로 예술계와 정치권의 찬사를 받았음을 상기시켰다.
특히 구동독 시절 혹독한 예술검열에 시달렸던 구동독 출신 예술가들은 지테와 같은 거장을 그런 식으로 다루고 있는, 통일독일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독 검열’에 경악했다.
건국 이후 구동독 지식인들을 당이 제시한 ‘더 나은 삶에 대한 꿈’, 즉 유토피아에 대한 뜨거운 동경으로부터 깨운 것은 세 발의 총성, 세 건의 봉기사건이었다.
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 노동자 봉기사건, 1956년 10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봉기사건, 그리고 1968년 8월 소위 프라하의 봄이 그것이다.
공산독재에 대한 시민항거인 이 3건의 봉기는 결국 모두 소련군 진압탱크의 무자비한 총성, 무자비한 피의 진압으로 끝이 났다.
구동독 문학엘리트들이 동독정권이 제시한 유토피아가 아마도 거짓된 출구, 즉 권력을 위한 통속적 프로파간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적극적 의심을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최초의 총성, 즉 동베를린 노동자 봉기사건을 혹독하게 치러낸 후였다. 설상가상으로 동독은 1961년 베를린장벽을 구축했다.
그렇다면 구동독 미술가들이 그들이 맹신하고 있던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을 버린 것은 대체 언제였을까.
최초의 사건은 아마도 1970년 화가 하이시히가 그려낸 ‘레닌과 의심하는 노동자’일 것이다. 물론 1977년에도 어떤 화가는 ‘레닌, 그는 세계의 잠을 만졌지’라는 그림을 그릴 정도로 레닌은 동독내에서 오랫동안 신성불가침의 성자(聖者)였다.
그러나 이미 1970년 화가 하이시히는 레닌 곁에 그가 제시한 유토피아를 의심하는 한 늙은 노동자를 나란히 그려냄으로써 ‘유토피아로 오인된 권력’에 대담한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이듬해 더 명료한 알리바이가 등장한다.
역시 라이프치히 학파인 볼프강 마토이어가 충격적인 작품 ‘시지포스의 도주’를 그려낸 것이다. 끝없이 산의 정상을 향해 온 몸의 근육을 움직이며 거대한 돌_희망_을 굴려 올리던 왕국 고린트의 젊은 신_동독의 젊은 공산주의자_은문득 그 돌을 내던져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동독정권이 제시하는 유토피아가 기만에 찬 ‘유사(類似) 유토피아’임을 깨달은 것이다. 탱크, 총성, 베를린 장벽이라는 추문들과 함께 가야 하는 유토피아란 더 이상 유토피아일 수 없는 것이다.
낙원의 문을 여는 황금열쇠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당의 주장은 허위이거나 주문(呪文)임이 드러난 것이다.
1971년 화가 마토이어의 젊은 신 시지포스가 굴려올리던 그의 돌을 버렸던 지점, 그것이 바로 동독의 희망이 정지된 지점인 것이다.
조각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8년 동독정권은 라이프치히 칼마르크스 대학교회를 폭파시킨 후, 소위 교회 살해현장인 마르크스 광장에 현대식 대학건물을 세웠고 그 정면을 장식할 사회주의기념조각을 공모했다.
당시 29세의 젊은 조각가이며 대학강사였던 프랑크 루디히카이트가 기념조각 ‘마르크스와 유토피아’로 당선됐다.
그가 완성시킨 작품 속엔 거대한 마르크스의 두상과 민중, 그리고 그 선봉에 선 아름다운 한 여인이 조각돼 있다.
루디히카이트는 제작 당시 그여인의 모델로 프랑스혁명의 산모인 자유의 여신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한 막역지우는 그 조각 속의 여인은 당시 라이프치히 최고의 미인이었던 루디히카이트의 아름다운 첫 아내 ‘파울리나’라고 내게 귀띔해주었다.
그러나 이후 자유를 갈망하던 그의 아내는 서독으로의 탈주가 좌절되자 감옥 같은 동독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것이다.
통일 이후 라이프치히시는 그 광장의 이름, 칼마르크스를 폐기시켰다. 도시 곳곳의 모든 마르크스동상들도 철거됐다.
그러나 루디히카이트의 이 거대한 마르크스 조각만은 철거작업이 어려워 지금까지 방치되고 있다. 통일 후 시민들은 그 조각 위에 살해된 대학교회를 기념하는 붉은 철근상징물을 부착시켰다. 그리하여 마르크스 조각과 교회상징물은 그렇게 서로 뒤엉킨 채 시대의 이념에 따라 진저리치는 가치의 교란을 잘 웅변해주고 있다.
“1968년 당시 나의 유토피아는 칼마르크스였어요. 자유의 여신과 동행하는 마르크스말입니다. 그러나 동독정권은 그 마르크스에서 자유의 여신을 납치해 갔죠. 인간에겐 누구나 벽(癖)이 있지요. 끝없이 유토피아를 동경하는 것, 그것도 일종의 벽이죠. 마약에서 유토피아까지 인간은 자기를 탐닉시킬 그 무엇을 찾아 헤매죠. 유토피아를 열렬하게 동경했다는 것이 대체 죄가 됩니까. 통일이후에도 구동독 출신 예술가들은 참을성 있게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요. 전시회 취소 사건 이후 화가 지테에겐 국내외로부터 무려 30여 건의 전시회초청이 쇄도했죠.”
그로부터 30여년 후인 요즘 조각가 루디히카이트는 여전히 같은 도시, 같은 화실에서 마르크스를 조각하던 손으로 성녀 잔다르크를 그리고 있다.
막 작업이 끝난 그의 잔다르크는 거대한화폭 속에 누운 채 그녀 자신의 성기를 격하게 움켜잡고 있다.
그는 말한다. “유토피아란 바로 잔다르크죠, 영원히 정복되지 않는 무서운 처녀성, 그것이 내겐 바로 유토피아입니다.”
/재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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