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후2시 서울 명동 입구 유네스코회관6층 A&O인터내셔널 사무실. 실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단정한 복장의 여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가운 인사말로맞이 한다. 20여평 남짓한 사무실은 그다지 호화스럽지는 않아도 깔끔한 외관이다.6개의 상담 창구 중 한 곳에는 직장인으로 보이는20대 여성이 대출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각 상담 창구 책상 위에는 대출 금액별 이자표와 함께 이른바 ‘대출 수칙’이 빼곡히 적혀있다.‘대출서류 외부 반출 금지’, ‘대출이 거절되거나 대출금액이 희망금액보다 적더라도 사유는 고지하지 않는다’ 등등.
대출 가능 금액을 묻자 직업과 소득을 확인한다.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라고 하자 공손하게 “소득이 없으면 대출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이다.
2~3년전 국내에 진출한 일본계 대금업체가 무서운속도로 소액 사채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골방 같은 음침한 사무실이나 폭력을 동원한 자금 회수 등 전형적인 사채(私債)의 이미지를 떠 올리면 오산이다.과학적인 신용분석, 철저한 연체 관리, 신뢰를 생명으로 하는 기업형 경영 등 어지간한 제도권 금융기관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일본 대금업체 진출 현황
국내에서 영업중인 일본계 대금업체는 어림잡아 7~8개. 이 중 선두주자를 자처하는 곳은 후지기획이라는 일본 히타치신판 계열사가대주주인 A&O인터내셔널이다. 1999년3월 국내에 들어온 이래 99년말 370억원, 2000년말 885억원, 8월말 현재 1,349억원등으로 대출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1인당 대출금액이 통상 100만~200만원 안팎인 것을 감안하면 고객수가 최소 5만명을 넘어선다는얘기다.
99년11월 국내에 진출해 55개의 영업점을 구축한프로그레스 역시 만만찮은 영업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8월말 현재 대출 잔액은 887억원으로 지난해말(597억원)에 비해 50% 가량 늘어났다.
이밖에 센츄리서울, 해피레이디, 캐쉬웰 등 소위 잘나가는 대금업체들은 대부분 일본계 자금으로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채는 곧 금융상품
A&O인터내셔널 관계자는 “사채가 개인간의 음성적 돈 거래가 아니라 일종의 금융상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줬기 때문”이라고 성공 비결을 말한다. 통상 월 8.1%, 연 97%에 달하는 초고금리를 적용하고 있지만 급전이필요해 오전에 돈을 빌렸다가 오후에 갚는 고객에게는 단 한 푼의 이자도 물리지 않는 등 고객을 ‘왕’으로 대접한다.
대출심사 및 채권추심 노하우는 외부에 노출하지 않는것으로 유명하다. 무담보, 무보증으로 대출이 이뤄지는 대신 대출금액은 아무리 많아도 500만원을 넘지않고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단돈 100만원도 대출이 이뤄지지 않는다. 신청 직후 1시간 내에 대출이 이뤄지지만 가족사항, 직장, 소득액 등 30여가지 항목에 대해 꼼꼼한 검토가이뤄진다.
철저한 연체 관리는 가장 큰 강점이다. 기존 사채업자들이폭력과 협박을 동원해 추심에 나서는 반면 일본 대금업체들은 연체가 발생하기 전에 수시로 이자납입기일 등을 통보, 연체율이 5%에도 못 미친다.A&O는 3월부터, 프로그레스는 8월부터 제일은행과 제휴를 맺고 고객들에게 멤버십카드를 발행하기도 했다.
■국내 사채시장 대변혁
일본계 대금업체의 급신장은 국내 업체의 반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대금업체인 굿머니크레디트는최근 일본계 대금업체 대출증서를 가져오는 고객에게 1% 낮은 금리로 갈아탈 수 있는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회사 관계자는 “후발주자로서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일본 대금업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라고 말했다. 개인 사채업자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상호신용금고 등 제도권 금융기관이 연 60%짜리소액대출상품을 내놓으며 사채시장에 줄줄이 뛰어드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향후 일본 대금업체들의 ‘공세’는 더욱 거세질 전망.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현재 국내에 진출한 일본 대금업체는 그야말로 ‘피래미’ 수준에 불과하다”며 “프로미스,아이필, 니신 등 일본 굴지의 대금업체가 호시탐탐 국내 진출을 노리고 있어 국내 사채시장은 일대 지각 변동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들 일본 굴지의 대금업체들은 조만간 한국 투자설명회를 개최키로 하는 등 국내 진출을 위한 막바지 채비에 들어갔다. 특히 대금업의 등록 및 사채이자율을 제한하는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면 법적 보호 아래 본격적으로 국내에서 영업을 개시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감독원 비은행감독국 조성목(趙誠穆)팀장은 “국내 사채업자들이 영업 노하우를 배우고 서민들에게 자금이 더 투명하게 공급된다는 점에서 일본계 대금업체의 진출은긍정적이라고 본다”며 “하지만 자칫 국내 자금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만큼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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