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폴은 트리니다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작품활동을 한 작가이다.이러한 전기적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 지리적, 문화적 출생에 관계되는 많은 것들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동인도를 따라 트리니다드로 출발한 계약제 노동자의 손자였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자신들의 문화에서 살아 남지 못하고 ‘다른 문명에 다른 목적으로 자신들을 접목시키길 원하고 성공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네이폴이 이상화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네이폴은 그 접목을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동양과 서양의 접목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본 것이었다.
그는 그 결합을 ‘그로테스크한 혼성주의’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은 식민주의자들이 피아를 구분한 마니교적인 이분법에 의한 것이었을지 모르고,많은 경우 네이폴에 대한 비판은 이 점에 집중된다.
결국 네이폴의 작가적 삶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뿌리로부터의 거리두기 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의 국가와 문화를 이국적으로 만들어 제1세계의 시장을 겨냥하는 제3세계 작가들, 특히 인도나 아프리카 작가들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여기에서 이국적이라 함은 부족적(tribal)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의 것인데, 이 말은 네이폴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함축된 말일 것이다.
그가 서인도제도 작가 혹은 포스트콜로니얼 작가라고 불리우는 걸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것도 그의 이러한 문학적 입장을 보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는 그러한 명칭에 붙은 편견과 정치성을 싫어한 작가였고 어쩌면 지금까지 발표한 그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그 편견과 정치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싸움이었다.
말도 많고 논란거리도 많았던 그의 파란만장한 작가적 삶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뿌리를 잃은 한 작가의 발전과정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꿸 수 있는 일련의 발전소설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네이폴의 작가적, 비평적 입장은 많은 작가들과 학자들과의 불화관계를 형성해왔다. 에드워드 싸이드 같은 사람은 그의 담론이 식민주의자들의 담론과 아주 흡사하다고 비판한다.
즉 싸이드는 네이폴이 제3세계의 문제들이 악의적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제3세계사람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고 혹평한다.
그러나 네이폴은 이러한 비판에 아랑곳 없이 자신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작가라고 반박한다.
제3세계에 대한 네이폴의 시각의 정당성 여부와 상관업시 그는 끝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한 작가였고 인생의 후반기에 갈수록자신의 뿌리로부터의 거리두기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그 뿌리에서 찾으려고 했던 아이러니컬한 작가였다.
1987년 발표한 그의 자전적인 소설‘도착의 신비’(an enigma of arrival)는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결국 자신의 정신세계와 정체성을 그가 부정했던 것에서 찾는 네이폴의 마지막 여정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것이다.
/전북대영문과 왕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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