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6월. 휴가철을 코앞에 두고 데스크로부터 만연한 조직폭력배의 폐해를 취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시경출입기자를 막 끝낸 나는 그 날로 특별취재단 구성에 들어갔다. 특별취재단은 젊은 경찰기자 1명과 사진기자 1명을 1개 팀으로, 모두 11개팀 20여명으로 짰다.
조직이 철저하게 비밀에 쌓여있고 활동 또한 음습한 곳에서 이뤄지는 조직폭력배 세계는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취재팀에 지역을 분담시켜 조직을 파악하도록 지시했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갈수 밖에 없었다. 인맥을 총동원, 조직폭력배 중간 보스급 3~4명과 선이 닿게 됐다.
이들 가운데는 “신변에 이상이 올 수 있는데”라고 협박하거나 “공연한 공명심을 버리라”고 타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계보의 곁가지만 파악한 채 조바심을 하고 있던 차에 만난 한 조직폭력 중간보스는 취재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다.
서울의 H, 3대 패밀리, 부산의 C, 인천의 G, 광주의 C, 수원의 N파 등의 계보였다. 이후 1주일 여동안의 취재 끝에 전국의 계보를 대강이나마 그릴 수 있었다.
취재팀은 낮에는 계보를 확인하고, 밤에는 잠행취재에 들어갔다. 취재과정에서 협박을 당한 것은 헤아릴 수도 없고, 경기지역 취재팀은 한밤에 취재ㆍ사진기자 등 2명이 조폭들에게 감금당해 뭇매를 맞고 필름까지 뺏겼다. 사회부에도 협박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한 달여 취재 끝에 기사는 ‘폭력 이대로 둘수 없다’ 는 간판으로 7월 7일부터 한국일보 1면과 사회면 등 3~4개면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첫날부터 피해를 당하고도 숨을 죽여오던 건설회사직원 연예인 영세상인 유흥업소주인 포장마차주인 등 각계 각층의 시민들로부터 제보가 쇄도했다. 시리즈가 연재됐던 9일동안 접수된 제보만 자그마치 대학노트 2권 분량이었다.
그러나 사흘째 되던 날 편집국에는 한때 긴장감이 감돌았다. 검은 양복차림의 5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나타났다. 대뜸 편집국장 면담을 요구한 이들은 국장실로 안내된 뒤 선채로 한동안 주위만 살폈다.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국내 최대 계파로 알려졌던 H회 간부였던 이들은 명함을 건네며 무거운 입을 뗐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단체의 건전성을 설명한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H회를 해체키로 했다”고밝혔다. 전혀 의외였다. H회는 약속대로 며칠 후 시내 한 호텔에서 행사를 갖고 공개 해체됐다.
20여명의 취재기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뛴 결과는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경찰은 시리즈 연재 중 특별수사기동대를 발족해 조직폭력배 소탕에 나섰다. 정부도 뒤이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다만 지금 아쉬운 것은 정부가 전쟁까지 선포하고 소탕작전을 벌였던 조직폭력배가 지금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2년 전 취재수첩 속의 전국 조직폭력배 계보가 최근 경찰이 공개한 계보와 별로 다르지 않아 씁쓸하다.
박진열 편집 부국장
pet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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