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성시에 사는 고은(68)시인은 서울 나들이가 없는 날 글쓰기를 잠시 놓은 뒤 창문 밖을 내다보는 버릇이 생겼다.문을 열지 않아도 밖의 일을 알아차린다는 풍류에 취했던 시인은 문득 닫혀진 문을 바라봤다.
문이 있다는 것은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일을 뜻한다. 그 문을 열고 내 발로 나가 여기저기 거닐어야 옳지 않은가.그렇게 깨달은 시인은 어느날 세상으로 난 문을 열고 길을 떠났다.
고은 시인이 새롭게 펴낸 산문집‘길에는 먼저 간 사람의 자취가 있다’(마주한 발행)는 ‘몇해 동안 길을 걸어온 자의 흔적’이다.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간 시인은 만주 벌판의 황진(黃塵) 가운데 평온한 노인의 얼굴에서 인간의 근원을 발견했다.
하버드대와 버클리대 객원 교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터키를 기행했다.
인류 문명이 화려하게 발아했지만 이제는 폐허가 된 도시를 순례하면서 앞선 역사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이 여행의 기록은 ‘고대에의 떠돌이’로 묶였다.
하버드대에서 만난 시인 게리 스나이더는 그에게 말했다. “길은 당신을 어느 곳인가로 데려간다. 그런데 그 길에 반대되는 것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길 밖에 있다.”
시인은 직선으로 난 길을 앞만 보면서 걷지는 않았다. 눈을 돌려 길 밖의 풍경을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 이야기를 적어 보내면서 비로소 문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됐다고 고백한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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