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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 조폭들이 판친다

입력
2001.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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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습한 밤거리에 기생해오던 깡패들이 마침내 유흥가를 뛰쳐 나왔다.영화나 드라마 따위에 얹혀 어느 때부터인가 일상의 낯설지 않은 존재로 다가들던 폭력배들이 드디어는 정·관·재계까지 깊숙히 스며 들었다.

요즘 온통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이른바 ‘이용호(李容湖)게이트’에서 보듯 가히 ‘조폭의 전성시대’가 재래(再來)한 꼴이다.

건달이니, 조직이니… 뭐라든 결국 패거리 깡패에 불과한 그들이 사회를 암세포처럼 좀먹어 들어가고 있다.

▦ 정·관계의 줄이 곧 밥줄

“주먹으로 벌어먹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누가 권력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깡패의 서열을 결정합니다.”

수도권의 폭력조직 두목 김모(38)씨는 올 초부터 모 명문대 대학원 최고위과정에 다닌다.

해결사 노릇을 하며 이름을 올려놓은 건설회사 상무 명함으로 입학자격을 얻었다. 함께 수업을 듣는 정부 고위관료들과 안면을 트기위한 목적이다. “골프와 술 접대에 가끔 도자기 같은 고가의 선물을 건네면 어렵지 않게‘내 사람’을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요즘 보스급들 사이엔 학교 다니는 게 유행입니다.” 그는 “이렇게 만든 인맥은 폭력 사건, 세금 문제 등의 방패막이가 되는 것은 물론 증권, 부동산 개발에 관한 고급정보원도 된다. 수십, 수백배 장사인 셈”이라고 덧붙였다.

검찰과 경찰에는 주로 선도위원회, 자문위원회 등 관변 조직을 통해 접근한다. 대형 술집이나 건설업체 대표 등의 직함을 앞세워 정기 총회 또는 회식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관계를 만든다.

“깡패들이 주최하는 술자리는 화끈한데다, 원하는 모든 것이 제공됩니다. 그러면 대개는 곧바로 ‘형님, 동생’하는 사이가 됩니다.” 은퇴한 원로 깡패 박모(58)씨의 얘기다.

정치권의 경우는 폭력조직에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한다. 적과 동지가 확연한 선거판엔 가급적 끼어들지 않는다는 게 깡패사회의 불문률이지만, 약점이 있거나 유력한 후보가 상당한 ‘대가’를제안하면 시장과 유흥가를 중심으로 바닥표 엮기에 나선다.

50명 규모의 폭력조직을 거느리고 있는 김모(45)씨의 경험담. “지난해 총선때였습니다. 한 후보가 자기를 도와주면 당선 후 건설수주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길래 응했습니다. 자원봉사자로도한 30명을 보냈지요.

그런데 며칠 후 상대 후보측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쪽 선거비용에 관해 양심선언을 해주면 더 큰 공사를 맡게 해주겠다고요. 정말 요지경이더군요.”

▦ 주식ㆍ사채시장에도 창궐

서울 강남과 이태원 등지를 무대로 하는 폭력조직의 부두목급인 S(39)씨는 현금만 50억원 가량 굴리는 부호. 압구정동 70평형 아파트에 살면서 벤츠 520을 굴린다.

강남 4~5곳의 대형 룸살롱과 단란주점 등 유흥업소에 주류와 물수건, 안주 등을 공급하면서 조직자금을 조달하던 S씨가 이처럼 ‘성공’한 건 3년전부터 본격적으로 손댄 주식 턱. 이른바 ‘작전세력’과손을 잡아 치고 빠지기를 수십차례 반복한 결과였다.

S씨는 “고급 정보에 확실한 작전세력이 뒤를 받쳐주기 때문에 손해 볼 일이 없다. 물론 이득을 보면 ‘유관기관사람’에게 반드시 거액의 커미션을 건넨다”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도 “최근 2~3년 사이 기업가나 사업가로 위장한 조폭들이 주식투자로 많게는 수백억원을 번 것으로 판단하고있다”며“이 과정에서 조폭과 증권회사 직원 등의 유착 여부 등을 정밀 추적 중”이라고 전했다.

주식 못지않은 깡패들의 자금줄은 사채다. 적게는 20%, 많게는 70~80%의 고리를 뜯으며, 원금을 변제하지 못하면 잔혹한 폭력을 행사한다.

5~6년전만해도 조폭들은 사채업자의 청부에 의해 악성채권 회수를 맡는게 고작이었지만 최근에는 사채사무실을 직접 경영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경기 남양주 Y(29ㆍ여)씨는 지난해 8월 폭력배인줄 모르고 A씨로부터 ‘20% 이자에 한달만 쓰는 조건’으로 500만원을 빌렸다가 성폭행에다 야산에 생매장까지 당하는 협박을 겪은 끝에 결국 원금의 5배에 달하는 2,500만원을 뜯겼다.

한 폭력배는 “사채야말로 주먹세계에서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투자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 중소 건설업계는 요지경

경기 중소도시 출신의 조직폭력배로 지금은 어엿한 건설회사 이사로 앉아있는 O(38)씨. ‘동생’들을 동원, 협박과 폭력으로 아파트 완전분양을 2차례나 성사시킨 능력을 인정받아 이 회사 사장으로부터 ‘발탁’됐다. 분양뿐이 아니다. 그의 능력은 땅 매입과정에서부터십분 발휘된다.

업체들이 점찍어 둔 아파트 건설 예정부지의 지주들에게 주먹들을 보내 협박, 막무가내로 땅을 내놓도록 하는 것.

물론 제대로 땅값을 지불할리도 만무하다. 계약금만 주고 중도금은 “나중에 계산하자”며 차일피일 미루다 떼먹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O씨는 “시행권을 조폭이갖고 시공만 건설회사가 맡아 공사대금을 제외한 모든 수익을 폭력배들이 챙기는 경우도 적지않다”며 “분양한번잘 하면 10억원 정도 거뜬히 만질 수 있다”고 말했다.

낙찰받은 업체를 찾아가 공사포기를 종용하는 것은 전통적 수법. 지방 K시의 하수도보수공사를 낙찰받았던 L사는 지난달 끝내 공사를 포기했다.

지역 폭력조직원들이 수시로 찾아와 사장에게 칼을 들이대며 “공사대금의 10%를 줄 테니 손을 떼라”고 협박한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공사 발주시 아예 ‘조폭 몫’을따로 떼어놓는 경우도 있다. 지방에서 중소 건설업체를 운영하는 J(50)씨는 “보통총 공사대금의 20% 정도를 조폭들의 경비로 책정한다”며 “특히지방 소도시에서는 주먹들을 무시하고는 사업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지난달 하순 지방 P도시의 아파트 단지 재개발 입찰에 앞서 열린 업체 설명회에는전국의 40대 실세주먹들이 모두 모여 폭력세계에서 한바탕 화제가 됐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한 경찰은 “모든업체가 주먹을 끼고 있다고 고백하는 장소처럼 보였다”고 고개를 저었다.

▦ 벤처도 예외가 아니다.

벤처캐피털 대표 A씨는 “어느 전국구 조폭은 대리인을 내세워 50억원 정도의 자금을 10여개 벤처에 5~6억원 가량씩 분산투자한 상태”라며“당연히 기술개발 따위에 관심없는 조폭들이 노리는 것은 정부의 벤처육성자금”이라고 말했다.

테헤란 벤처밸리에 사무실을 갖고있는 B씨는 이른바 전국구 폭력조직인 OB파 출신.자금사정이 어려운 벤처업체들을 상대로 사채놀이를 하면서 전망있는 업체를 협박해 경영권을 빼앗기도 한다.

얼마전 구속된 칠성파 두목 이모씨는 한ㆍ중합작벤처를 설립하기도 했고 이 단체 자금책으로 알려진 정모씨는 테헤란밸리에 다단계 판매회사인 S벤처 엔젤을 차려놓고 투자자로부터 70여억원을 가로챘다가붙잡혔다.

인터넷 벤처업체 C대표는 “90년대 말 자신이 관리하던 룸살롱 마담들이 벤처 투자로 큰 돈을 번 것을 목격한 조폭들이 벤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면서“그들 중 상투를 잡아 원금마저 까먹은 상당수는 투자한 벤처 CEO들을 상대로 ‘손해를 보상하라’며 끊임없이 협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조폭들이 벤처에 눈을 돌리는 이유는 신분 위장이 용이하고 벤처업체가 집중된 코스닥이 당국의 규제 허술로 주가 조작이 용이하다는 점 때문이다.

최근에는 벤처 업계에 분쟁이 잦아지면서 조폭에게 해결사 역할을 해달라는 수요도 늘어나는추세. 사설 펀드운용사의 D대표도 업계 유명인사에게 거액을 사기당할 뻔했다가 조폭에게 의뢰해 해결한 경우. “단며칠만에 통장에 돈이 고스란히 들어와 있더군요. 조폭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예요.“

경찰도 조폭들이 벤처업계를 무대로 해 마피아식으로 기업조직화하는 조짐을 포착,감시를 강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찰청 폭력계장 허영범(許英範) 경정은 “90년대 후반부터 조폭들이 유흥업소 운영이나 건설입찰 개입 등 ‘전통 분야’에서 벗어나 주식 벤처 등 경제적 이권이 걸려있는 모든 분야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조직규모도단속을 우려해 30명 이하의 소규모화 하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분석했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김진각기자

key@hk.co.kr

■조직폭력배 현황

경찰청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폭은 199개파 4,153명.서울 지역이 26개파 294명으로 계파 숫자로 따져 가장 많다.

핵심지역인 서울 강남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조직은 범서방파, 신송정리파, 대흥동파등이다. 한 때 이름을 날렸던 ‘3대 패밀리’도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양은이파에는 28명의 조직원이 있으며 서방파가 원류인 범서방파도 11명이 가담해 있다. 여전히서울을 근거지로 하고있는 이들과 달리 OB파는 주 활동무대를 광주에 두고 신양OB파(38명)와 충장OB파(47명)로 나뉘어 있는 것으로 경찰이 파악하고 있다.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있는 여운환(呂運桓)씨로 인해 이름이 오른 국제PJ파는광주 지역에서 가장 많은 55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1980년대 일본 야쿠자와 의형제를 맺는 비디오가 공개돼 널리 알려진 부산 칠성파는지금도 조직원 58명의 거대 조직으로 부산에서 활동중이며 일부는 신칠성파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당국의 공식자료는 현실과 차이가 있다는 게 ‘현역’들의 얘기다. 전국구 조직원 A씨는 “경찰자료는 전과기록자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범법사실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 신흥 조직이나 배후 거물은 명단에 올라있지 않다”고 말했다.

더구나 교통, 통신수단의 발달로 이른바 ‘나와바리(활동구역)’ 개념이 사라지고 세력 과시형 대규모 패밀리도 자제하는등 과거 폭력계 양상과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요즘 잘 나가는 조폭들은 굳이 거대 패밀리가 되려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범죄라도 양은이파니 하는 이름과 연관되면 1년 살 것을 10년 사는 데 뭐하러 그러겠어요.

이제는 그저 필요에 따라누구밑에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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