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정말 아름다운 고양이, 높은 곳에서 춤 춰도 어지럽지 않은 그 아픔없는 눈, 슬픔 없는 꼬리, 너무 너무 좋을테지’1986년 가수 시인과 촌장은 ‘고양이’를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나 유년 시절,고양이는 친근함의 소재가 아니라 여름 밤 괴담의 주연이었거나 쌀쌀맞고 요망한 동물의 상징이었다.
고양이와 가장 닮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무 살 무렵의 여자들일지도 모른다.
애완동물이면서도 때때로 가출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고양이처럼, 스무 살의 여자들은 가정과 사회를 오가며 방황을 한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여상을 졸업한 동창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왜 대학에 가지 않았는지는알 수 없으나 대학을 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을 여러 가능성과 위험으로 내몰고 있다.
아버지가 경영하는 찜질방의 카운터를 맡고 있는 태희(배두나)는 뇌성마비 시인의 타자수 노릇을 하고,버스 안 잡상인의 넋두리를 버티지 못해 물건을 사고 마는 마음 여린 스무 살.
혜주(이요원)는 증권사 사환으로 돈을 모아 성형수술을 하겠다는 야심을가진 스무 살.
지영(옥지영)은 병든 할아버지와 인형 눈을 붙이는 할머니와 함께 살며, 직장에서 월급도 받지 못하고 쫓겨난 우울한 스무 살.
비류(이은실)와 온조(이은주) 쌍둥이 자매는 머리핀이며, 목걸이 같은 것을 만들어 코흘리개들에게 팔며 자립을 꿈꾸는 씩씩한 스무 살. 그들의 스무 살은 경쾌하고,여리고, 뻔뻔스럽고, 비참하다.
스무 살에게는 스무 가지도 넘는 고민이 있다.
외항선을 타고 싶지만 여자라서 안 되는 태희, “언제까지 저부가가치 인간으로 살 것이냐”는 상사의 충고에 눈물을 흘리는 혜주, 다른 무엇인가를 꿈꿀 수 없기에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최신형 휴대전화를 사는 지영.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바람맞히기도 하고,상처주기도 하고,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친구들에게 더욱 뻣뻣해진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공간에 대한 탁월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그들이 빠른 손을 놀려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 그들의 대화는 지하철 유리창이나 건물의 외벽을 타고 관객 앞에 보여진다. 장애 시인이 낭송하는 시를 태희가 타자기로 받아 칠때도 탁자 밑으로 연신 시구(詩句)가 흘러간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집착은 사람보다는 공간에 집착하는 고양이, 고양이로 은유되는 스무 살 주인공의 내면과 조응하면서 영상 매체를 십분활용할 줄 아는 감독의 재주를 부각시킨다.
물론 70곳에 달하는 인천의 로케이션 장소를 너무 많이 보여줘 무의미한 장면도 눈에 띈다. 지영과 태희가 여행을 떠나는 엔딩 장면 역시 지나치게 비약적이라는 결점도 보인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일상과 우울을 심도있게 이야기하면서도 페이소스가 깔린 웃음을 곁들일 줄 아는 영화는 이전에는 없었다.
주연 여배우들의 연기 역시 일상을 찍은 비디오 카메라처럼 자유스럽다. 상업성과 작품성을 고루게 갖춘 신인감독의 탄생을 알리는 영화다. 12일 개봉
박은주기자
jupe@hk.co.kr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감독
정재은(32)감독은 고양이가 사람보다는 공간에 집착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애완으로 키우기엔 야생의 본성이 너무 강한 고양이. 그는 그 고양이에게서 스무 살의 처녀를 보았다.
“똑 같은 주제를 30대 여자나 40대 남자를 통해서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매혹적인 20대를 다루고 싶었다. 조금은 진정하게.”
인천이라는 공간에 대한 집착이 보인다. “인천은 식민지 시대 창고와 유신 시대의 공장, 신도시 아파트가 공존하고 여객선 터미널 등 외부와 통하는 관문이다. 싸구려 보따리 장사들이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 곳, 그 복잡다단한 면모가 세상으로 막 나가려는 스무 살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문자 메시지를 띄우는 공간의 활용이 돋보인다.
“문자 메시지는 젊은이들의 독특한 대화방식이다. 의례적인 안부 대신 직설화법만이 존재하는 소통 방식이다. 열린 느낌의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그들의 욕망을 표현하고 싶었다. 버스, 지하철 등 운송 수단이 많이 나오는 것은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공간 자체에 대한 매력 때문이다. 공간을 위해 에피소드를 만들었을 정도다.”
성공한 직장인을 꿈꾸는 혜주와 가난한 지영은 사사건건 부딪치면서도 갈등이 폭발하지는 않는다. 노련하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허물어지려는 지붕의 무게에 눌린 지영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많은 혜주의 갈등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일상에서그런 갈등은 쉽게 폭발하지 않는다. 공간의 긴장감으로 대체해 표현하려 했다.”
신세대의 생활 양식과 유머가 곳곳에서 빛난다. “사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녀 대부분 사람들은 트렌드에 관심이 없는 줄로 안다. 그러나 반대다. 당대의 트렌드와 기호를 영화에 담고 깊다. 대중과 소통하려면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도형일기’ 같은 단편을 보면 아트영화로도 접근이 가능한 감독처럼 보였는데 영화는 매우 대중적이다.
“영상원에 입학하기 전 감리교 신학대학 종교철학과를 마쳤다. 종교보다는 인간 사는 것에 대한 추상적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영화의 이름으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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