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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乙未事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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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乙未事變

입력
2001.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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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8일 일본인 자객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건청궁 옥호루에 머물던 민비(고종의 비ㆍ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살랐다.이것이 을미사변이다. 이 참혹한 테러의 주모자는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였지만, 거기에는 조선 정부 안에서 서로 반목하던 친일파와 친러파의 권력투쟁이 개재돼 있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박영효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 확장을 꾀했다.

그러나 프랑스 러시아 독일 세 나라가 일본의 대륙침략에 제동을 걸기 위해 청일전쟁 뒤 일본에 귀속된 랴오둥(遼東) 반도를 청국에 다시 돌려주도록 하자, 조선 정부는 이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쪽에 붙을 꾀를 냈다.

정부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제휴해 친일파 정치인들을 조정에서 몰아낸 뒤, 이범진 이완용 등 친러파를 주축으로 삼아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자 미우라는 친러파 정객들의 배후로 민비를 지목하고 그녀를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을미사변 뒤 조선에는 유길준 서광범 등 친일파 정객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됐다.

왕과 왕세자를 비롯해 몇몇 외국인 고문까지 있었던 궁궐에서 왕비가 살해되자 구미 열강은 일본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일본은 미우라를 비롯한 사건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했다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했다.

민비의 피살 뒤 항일 의병이 일어서는 가운데,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이듬해 2월 정동의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것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왕은 러시아공관에서 다시 친러 내각을 구성해 정사를 보다가 한해 뒤에야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다.

나라가 가장 위급할 때, 군주는 가장 무능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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