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의 어린 시절 노래에는 군가(軍歌)가 있다. 6.25 전쟁 중에 초등학교에 다녔던 우리는 조회가 끝나면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곤 했다. 적을 무찌르고 평화를 가져 다 줄 국군 아저씨들을 그리며 아이들은 있는 힘을 다해 큰소리로 군가를 불렀다.강원도 산길을 달리면서 우리는 먼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군가들을 찾아 냈다. 친구들 십 여명이 작은 버스를 빌려 떠난 여행길, 인제 양구 화천 철원 금화 등의 표지판을 보며 우리는 그 곳들이 6.25의 격전지였음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산속에 ‘6ㆍ25 전사자 유해발굴 장소’라고쓴 나무팻말이 서있는 곳도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나서야 이뤄진 유해발굴에서 어린 병사의 이름표가 나왔다는 기사를 읽은 생각이 났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떠 오른다 네 얼굴이 별 같이 꽃 같이…
어린시절 기억 속에서 찾아 낸 ‘전우야 잘 가라’ 를 부르다가 우리는 마지막 구절에서 목이 메었다. 이렇게 가슴을 치는 구절인줄을 어린 우리들은 몰랐었다. 옛 전우의 얼굴을오늘도 별 같이 꽃 같이 떠 올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난 여름 8ㆍ15방북단이 평양에서 돌아 오던 날 통일운동 단체의 젊은이들을 주먹으로 때리던 사람들이 바로 이런 노병이었을까. ‘피의 능선’을 지나며 우리는 ‘극우 반공’으로 몰았던 그들의 분노를 헤아려 보았다.
강원도 여행에서 돌아와신문을 보니 일제히 ‘흉흉한 민심’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추석연휴에 고향에 내려갔던 사람들은 민심이반이 생각보다 심각했다고 전한다.
“정치인 뿐아니라 경찰 검찰 국세청이 다 썩어 온 나라에 악취가 난다” “조폭들과 형님 아우하며 정치를 했단 말이냐” “끼리끼리 해먹어도 분수가 있지 너무한다” …등등의 비난과 원망이 들끓고 있다.
미국 테러에 대한 충격도 여론의 물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의원 보궐선거를 앞둔 여야의 공방으로사태는 더욱 악화하고 있다.
이런 사태를 주도적으로풀어야 할 김대중 대통령은 국군의 날 기념사 파문으로 곤욕을 치루고 있다. 지난달 28일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김 대통령은 “우리 역사상 있었던세 번의 무력통일 시도 중 신라와 고려의 시도는 성공했지만 세 번 째인 6.25사변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 네 번째의 통일 시도는 결코 무력으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추석연휴가 끝난 후에도 대통령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야권의 비난이 계속되고 있다.
6ㆍ25가 ‘실패한통일 시도’라는 말은 북한이 무력으로 적화통일 하려다가 실패했다 는 말과 같은 뜻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살짝 만 건드려도 6.25의 상처가 덧나는 우리 현실에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표현은 아니다. 50여년 전 잃은 전우의 얼굴을 별 같이 꽃 같이 떠 올리는 세대가 아직 살아 있는데,어떻게 대통령이 남의 나라 역사 말하듯 그처럼 ‘객관적인’ 표현을 한단 말인가.
반세기전의 군가를들 춰내어 미래를 향해 가는 남북관계에 시비를 걸자는 얘기가 아니다. 정부는 햇볕정책 최대의 걸림돌이 지역감정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 정부에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들이 핑계만 있으면 햇볕정책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조심해야 할 텐데, 이 정부는 그 동안 지엽적인 실수로 본질을 훼손당하는 불행을 여러 번 겪었다.
대통령 스스로 햇볕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한 것은 유감스럽다. 복잡하게 얽혀가는 정국, 등 돌리는 민심, 심각한 임기 말 현상을 극복하려면 대통령은 좀 더 유연하게 전후좌우를 배려하면서 말 그대로 ‘큰 정치’를 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대통령이 자신의 경직된 틀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란 인상을 자주 받고있다. 이번 ‘실패한 통일시도’ 표현도 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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