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타니즘이라는 말은 미국 저널리즘의 깔끔한 조어(造語) 가운데 하나다. 이 말은 기자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나라 안의 사건들보다 아득히 먼 나라의 일에 더 관심을 갖는 태도를가리킨다.이런 낭만적 저널리즘에 아프가니스타니즘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평범한 미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아프가니스탄이 가장 먼 곳, 세상의 끝간데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겠다. 아프가니스타니즘은 부정적 함축을 담아 고안된 말이지만, 드물게는 고안자의 의도를 배반하고 긍정적 맥락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타니즘이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 이 말은 가까운 곳의 중요한 일들을 제쳐놓고 먼 곳의 사소한 일들에만 관심을 갖는 쇄말주의(碎末主義)나 호사취미를 뜻한다.
그 말이 긍정적으로 사용될 때, 아프가니스타니즘은 자신이나 이웃 그리고 자기 공동체의 좁은 이해관계나 처지를 넘어서서 다원적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자신의 관심을 배분하는 개방적 태도를 의미한다.
지난 9월11일 이후, 미국인들에게 아프가니스타니즘이라는 말은 더 이상 예전의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됐다. 이제 그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은 아스라이 먼 곳이 아니라 가장 긴급한 쟁점들이 생산되고 있는 분만실이다.
미국 언론이지난 세 주 남짓 쏟아내 놓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말의 횟수는 그 이전까지 역사의 전 기간을 통해 이 나라의 이름이 발설된 횟수를 능가할 것이다.미국인들에게 아프가니스타니즘이라는 말은 앞으로 음습하고 폭력적인 이미지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한국인으로서, 이제 폐기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타니즘의 본디 뜻을 우리 현실의 지평에서 곱씹어보고 싶다. 9월11일 이후 얼마 동안, 우리 사회의 언로는 아프가니스타니즘의 부정적 측면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 긍정적 측면을 충분히 구현하지 못했다.
21세기 벽두의 이 동시다발 테러가 그 규모와 비극성에서 그리고 국제정치적 의미에서 엄청난 사변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 언론이 이 문제에 관심을 쏟은 것은 정당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국내의 쟁점들을 거의 다 묻어버릴 만큼 배타적 중요성을 지닌 일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것이 확실치 않다면, 우리는 그 기간동안 부정적 의미의 아프가니스타니즘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셈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번 사태를 주로 미국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국 정부의 지목에따라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사내와 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탈레반 정권은 테러의 배후가 됐고, 이 끔찍한 유혈 사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폭력지향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낙착됐다.
그래서 이 사건의 정치ㆍ경제적 의미는 묻히고 문화ㆍ종교적 의미만 크게 부각됐고, 무고한 민간인들을 수없이 살상할 전쟁은당연한 것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슬람 세계에 대해 정보도 이해심도 모자랐던 우리에게 미국 정부는 이 사태를 보는 프리즘이었다.
우리는 미국정부의 처지를 우리에게 투입해 그 자리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았다. 미국 정부에 적대적인 입장까지를 포함한 다원적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려는 노력은 크게 부족했다. 즉 우리는 긍정적 의미의 아프가니스타니즘을 충분히 실천하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타니즘은 그 부정적 측면을 통해서 우리에게 먼 곳만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도 관심을 기울이라고 권한다. 그것은 또 그 긍정적 측면을 통해서 우리에게 흔히 역지사지라는 말로 표현되는 열린 관점을 지닐 것을 권고한다. 이 교훈을 북한 문제에 적용하면 이렇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은 아프가니스탄에 쏠려있는 우리 관심을 나눠 돌려도 좋을 만큼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북한이 처한 식량난과 우리 농민을 괴롭히는 쌀 과잉생산 문제는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으로 남한의 쌀값을 안정시키는 해법을 최상으로 만든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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