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9월29일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영국의 체임벌린,프랑스의 달라디에 등 유럽 4개국의 정부 수반이 독일의 뮌헨에 모여 정상회담을 열었다.이튿날인 30일까지 계속된 이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병합하겠다는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국제 정치에서 유화 정책의 위험한 선례로 자주 거론되는 뮌헨회담이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독일은 다음 목표를 체코슬로바키아로 정했다.특히 독일과 국경을 접한 수데텐란트에는 독일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이 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이 지방을 독일에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ㆍ소련과 상호원조조약을 맺고 있었으므로, 독일과 체코 사이의 전쟁은 곧 유럽 전체로 번져나갈 터였다. 위기가고조되는 가운데 영국 수상 체임벌린은 독일 베르히테스가덴(9월15일)과 고데스베르크(9월22~23일)에서 잇따라 히틀러와 만나 회담을 했다.
히틀러의수데텐란트 병합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확인한 체임벌린은 9월27일 프랑스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9월29일의 뮌헨회담은 무솔리니가 소집하는 형태로 열렸는데, 여기에는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도, 그 동맹국인 소련도초청되지 않았다.
뮌헨회담 직전까지 총동원령을 내려가며 독일에 대해 항전의지를 보이던 체코슬로바키아는 회담의 결과에 따라 싸워보지도 못하고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빼앗겼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를 배신하면서까지 전쟁을 막아보려던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정책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은 바로 그 이듬해였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