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잊혀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떠올리기 위해서 남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야수의 잠’(현실문화연구)은 ‘기억’을 모티브로 삼았다.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 SF만화이지만 디스토피아적인 사회를 그려내는 것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니코폴’에 이어 국내에 두번째로 소개되는 프랑스 만화작가 엥키 빌랄(50)의 작품이다.
2026년.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원리주의를 주장하는 세 지도자가 이끄는 몽매주의 교단은 역사를 부인한다.
세계 중앙기억은행의 핵심 멤버이고 뛰어난 기억력을 지닌 나이키 아트스펠트는 몽매주의 교단의 지도자 워홀 박사의 입장에서는 존재해서는 안 될 인물. 워홀 박사는 세계 체제전복의 도구로 아트스펠트를 선택한다.
아트스펠트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내려는 것은 강박적이기까지 하다. 태어났을 당시 병원에 나란히 누워있었던 두 고아 레일라와 아미르를 찾아내려고 한다.
출생 직전까지 기억을 되살려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을까. 유네스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빌랄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는 종교적 원리주의”라고 고백했다.
‘야수의 잠’은 1999년의 코소보 사태를 비유적으로 담아내고 있음을 인정했다. “보스니아인, 회교도인, 세르비아인이 될 수도 있고 크로아티아인, 슬로비아인, 몬테그로인, 마케도니아인, 코소보인도 될 수 있다”는 등장인물의 독백은 구 유고연방 출신의 빌랄의 분열된 고국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빌랄이 그리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사회는 익숙한 이미지이다. 파랑과 회색의 차가운 색조는 비관주의적 분위기를 짙게 한다.
몽매주의 교단이 국제회의장 등에 가하는 테러는 11일 미국에서 발생한 동시다발적 테러를 연상시켜 더욱 암담하게 만든다.
프랑스에서 ‘제9의 예술’로 대접 받고 있는 만화가 2년 전부터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특히 빌랄의 작품은 올해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도 소개되는 등 국내 독자와 만남이 잦은 편이다.
‘니코폴’ ‘야수의 잠’ 등은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오가는 독특한 전개방식을 취하면서 비도덕적인 권력과 폭력에 대한 비판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만화를 시간보내기 용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까운 그림과 유럽의 지적 토양에서 나오는 대사를 소화하기가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문향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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