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고궁(故宮)은명나라 영락제에 의해 건축된 이후 500년간 중화제국의 성스러운 중심지로서 위치를 지켜왔다.고궁의 본래 이름은 자색의 금지된 성, 곧 자금성(紫禁城)이다.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자색은 중국의 우주관에 따르면 온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의 빛깔이기도 하다.
높은 궁전, 돌벽돌만이 깔려 있는 드넓은 외조(外朝)의뜨락에는 한그루의 나무도 심겨져 있지 않았다.
황제의 존엄과 황권의 지고무상의 권위에 손상이 가기 때문이었다. 이 뜨락에는 앉을 자리라곤 황제의의자 밖에 없었다.
절대권력과 우주적 역할을 반영한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최고의 하늘 궁전에 들어서는 자, 그 어느 누구도 궁전의 주인인 중화제국의황제 앞에 꿇어 앉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이 전 세계 나라들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나라일 뿐만 아니라모든 문화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전통적 ‘문화주의’는 대외관계에도 그대로 표현되었다.
하늘에 두 태양이없듯이 중국 황제 앞에 대등한 존재가 상정될 수 없는 중화제국 특유의 세계관에 의해 외국군주는 그가 설정한 높고 낮은 계급체제로 편입될 뿐이었다.
이것은 중국황제가 국내에서 유지하려고 한 ‘유교적’ 사회질서의 확대에 불과했다. 따라서 국제관계는 전통적조공관계 외에 다른 것이 설정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중국을 찾아 온 어떤 외국사절에게도 국내 관료와 마찬가지로 ‘세번 무릎꿇고 아홉 번 엎드려 절하는(三 九叩:叩頭)’ 예가 강요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중화제국의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국제관계란 상대적이기 때문에 일방적일수는 없는 것이었다. 특히 동아시아문화권을 벗어난 서방 여러 나라와의 관계는 더욱 그러했다.
중화제국의 대외태도는 그 스스로의 힘에 대한 인식의정도에 따라 달리 표현되기도 했다. 자신의 힘에 대해 자신만만하던 당대(唐代) 초기의 중국인들은 외부세계에 대해서 호기심도 많았고 포용력도 컸다.
713년 칼리프가 다스리던 이슬람 국가의 사절이 처음으로 중국으로 와서 전통적 고두(叩頭)의 예로서 황제 앞에 엎드리는 것을 종교적 이유를 들어거부하였을 때 중국인들은 그들의 요구를 쾌히 승낙하였다. 이는 수세기 뒤에 유럽사절들에게 이 점에 대해 극도로 엄격했던 것과는 사뭇 대조된다.
중화제국의 대외관이 이처럼 개방에서 폐쇄로의 변화는 당말에서 감지되기 시작하더니 송대에 들어 뚜렷해져 갔다.
이것은 이적(異敵)에 대한 공포와 적의가 증대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특히 몽골인의 중국지배는 외래문물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민족주의는 일반적으로 경쟁심리나 불안감 등과 밀접하게 결합되지만 중국인들의 외국인의 혐오감정은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독특한 자신감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들은 세계의 주변민족에 비해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을 때조차도 자신의문화적 우월성을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민족 우월감이 대외 관계를 지배하였고, 외래 자극에 대한 지적 심리적 면역성을 가져다 주었다.서양세력이 몰려오는 근대에 들어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려졌다.
중국과 유럽과의 관계는 포르투갈인들이 그 기조를 형성하였다. 1514년중국 동남해안에 도착한 그들은 중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과 유럽의 문화적 평등을 입증하는데 실패하였다.1517년 ‘포르투칼 국왕’은 그의 사신을 ‘중국 국왕’에게 보냈다.
광둥(廣東)에 도착한 이들 사절은 서양 고유의 격식대로 경의를 표하기 위해 예포를 쏘았으나 중국인들의 예절감각을 무시한 것이어서 즉각적인사과를 요구받았다.
결국 1522년 모든 포르투칼 인들은 광둥에서 쫓겨났으며 그들의 첫 번째 사절은 감옥에서 죽어야만 했다.
이러한 태도는 러시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끝없이 펼쳐진 시베리아를 횡단하는러시아의 식민지 개척은 느리고 점진적이면서도 비교적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식민지는 기후나 지세상 살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또 식량공급이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곡물이 자라는 지역을 찾아야만 했다.
그 결과 여름에는 거룻배로, 겨울에는 썰매로 산물을 운송할 수 있는 아무르강(黑龍江)에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코사크 원정대가 1656년 아무르강 지류 강변에 있는 네르친스크에 교역거점을, 1665년에는 알바진에 요새를 건설하였다.이렇게 건설된 러시아의 전초기지는 청제국과의 분쟁을 일으켰다.
1676년 러시아 군주(차르)의 신임장을 갖고 베이징에 도착한 사절은 황제가 차르에게 보내는 선물을 받을 때 무릎꿇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추방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처럼 상호 평등한 국제관계를 요구한 러시아 사절의 주장은 동아시아국제질서를 주도해 왔던 중화황제의 이념적 기초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1689년 청이 러시아와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네르친스크조약은 평등의견지에 입각한 것이었다.
동부 몽골에 대한 러시아의 원조를 막을 수 있고, 서부 몽골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할 계기를 얻은 강희제는 약간 명분적양보 위에 실리를 취한 것이었다.
그 후 청의 러시아 시절이나 무역상에 대한 태도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청 조정은 교역에 관심이 있었던것이 아니라 정치적 안정을 원했으며, 이를 위한 최선의 정책은 고립이었다.
접촉의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안정을 추구하려 한 청의 대외 정책은 광둥의해상 교역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교역은 법적으로 대서방무역의 독점권을 부여받은 ‘공행(公行)’이라 불리워지는 상인조합만을 상대하도록 허용되었다.
1760년부터 영국 등 유럽인들의 무역은 이렇게 완전히 중국의 통제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중국의 일부이지만 수도 베이징에서 가장 먼 항구, 광둥은 이렇게 세계무역체제 안에 편입되었으나 중화제국은 여전히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정치적으로 단절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닝포(寧波) 텐진(天津) 등 북쪽 항구에서의 교역을 요청하기 위해1793년 영국국왕은 마카트니(Macartney)를 대사로 파견했다.
그는 중국의 전통적인 조공제도와 부딪치게 되었다. 그가 가져 온 굉장한 선물은중국관리들에 의해 조공품으로 분류되었다.
청조는 마카트니에게 고두의 예를 행하도록 강청하였으며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 결과 광둥무역체제에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였다.
1795년 네덜란드에서 온 대사도 신년하례식 때에 중국의 종속국으로부터 온 사절들과 함께 줄지어 서 있는 자신을발견하게 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유럽은 엄청난 활력으로 팽창하고 있었으나 서방과 베이징의 접촉은 17세기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다.
중국의 제국적 전통을 계승한 청의 군주들은 국내통치를 위한 제도들을 완성하였고, 중국의 변방의 비중국인과의관계를 안정시켰다.
중국인의 생활방식은 본질에 있어서는 깨뜨려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중화세계의 폐쇄적 세계관이 깨뜨려지지 않는한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한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이화원-英·佛군에 소실됐다 재건 청황실 별궁서 유원지로
세상의 중심으로 겁없이 살던 중국은 유럽과의 역사발전에서 뒤쳐지면서 19세기에 이르면 호된 경험을 한다.
청나라때 황실 행궁이었던 이화원도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렸다. 그러나 1888년 서태후(자희태후)가재건에 들어가 10년만에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764년 처음 건조될 때는 이름도 청의원이었으나 서태후가 재건과 더불어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덕분에 지금은외세와 싸운 과거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서태후는 청나라 제7대 황제 함풍(1851년~ 1861년 재위)의 귀비로서 함풍이 죽은 후 48년간‘수렴청정’으로 대권을 흔들었다.
베이징 시내에 위치한 자금성에는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북적거리는 반면 베이징에서 북서쪽 19km 정도떨어진 이곳에는 중국인 가족 관광객이 더 많이 찾고 있다.
오래된 옛 건물이 만수산과 곤명호를 끼고 건축되어 아름다운데다 쉴 그늘과 보트 등의위락시설도 있어 유원지 삼아 오는 중국인들이 많다.
특히 이화원에서는 동쪽의 요월문에서 서쪽의 석장정까지 총 길이 728m, 273칸의 회랑이 유명한데 중국회랑 건축 중 제일 크고 제일 길고 제일 유명하여 ‘장랑’이라고 불린다.
워낙 유명한 회랑이다보니 관광 성수기에는 서울 종로통만큼이나 북적거린다고한다. 회랑 길은 장정 두 세 명이 겨우 다닐 정도라서 여름철이면 잘 씻지 않는 중국인들의 몸냄새를 실컷 맡아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역사에세이 팀이찾았을 때도 바로 그랬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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