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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붉은 아우성' 설악을 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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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붉은 아우성' 설악을 출발하다

입력
2001.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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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산하는 스스로를 붉게 태우고 잿빛 겨울로 식어간다. 불기둥 봉우리와 화염의계곡, ‘분신(焚身)의 축제’가 시작됐다.단풍의 불꽃이 가장 먼저 타오르는 곳은 설악산 대청봉. 이 곳에서 채화된 불은 산 아래로, 남쪽으로 그 뜨거운 기운을 옮기다가11월 말 제주의 한라산 기슭에서 소멸한다.

그 첫 불꽃을 찾으려 설악산에 올랐다. 백담사를 출발, 봉정암을 거쳐 중청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이튿날 대청봉에 오른 후 천불동 계곡을 타고 설악동으로 내려왔다. 22일 현재,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꼭대기에는 붉은 기운이 드문드문 피어오르고있었다.

백담사를 거쳐 대청봉으로 가는 길에는 불가사의한 풍경이 벌어진다. 9부 능선의사찰 봉정암에 오르는 불교 신자들이다.

봉정암은 남한에 있는 5대 적멸보궁(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곳)의 하나다. 기도를 하는 불자들로 언제나 북적댄다.

그러나 오르기가 만만치 않은 곳에 있다. 백담사부터 약 5시간 이상을 걸어야 한다. 마지막 구간의 ‘깔딱고개’는등산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르는 힘겨운 코스이다.

그런데 봉정암에 오르는 신도의 대부분은 여성이다. 그 중에60~70대 어르신이 반을 넘는다. 동네 마실가기도 힘든 다리를 옮겨 거친 산을 오른다.

어디서 힘이 솟을까. 상식적으로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신심(信心)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다. 믿음의 힘에 새삼 놀란다.

산행은 봉정암으로 향하는 신도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시작됐다. 산 위에 비가 많이왔는지 백담계곡은 아예 강물이 돼 버렸다.

계곡길도 곳곳이 물에 잠겨 비탈을 타고 우회해야 했다. 아직 단풍의 모습은 없다. 여전히 여름이다.

수렴동대피소를 지나면서 길은 가팔라진다. 칼날같이 솟은 용아장성을 왼쪽으로 끼고오른다. 갑자기 만나는 거대한 물소리.

조심조심 다가간다. 관음폭포이다. 원래의 위용에 불어난 물까지 보태져 어마어마한 규모로 쏟아진다. 소름이돋는다.

다시 10여 분, 쌍폭이다. 이번에는 머리털까지 쭈뼛해진다. 쌍폭 전망대에서 다리를 쉬어야 한다. 그 위로는 ‘공포의깔딱고개’이기 때문이다.

깔딱고개는 고개가 아니다. 약간 기울어져 있는 절벽이다. 네 발로 오른다. 어지간히힘이 좋은 사람도 숨이 턱턱 막힌다.

힘이 빠져 정신마저 혼미해질 즈음 우람한 바위 사이로 봉정암이 나타난다. 암자의 앞마당에 서니 그제서야 단풍이눈에 들어왔다. 전체가 붉지는 않다. 바위 절벽 위에 한 그루, 멀리 산모퉁이에 한 그루, 그런 식이다.

소청봉을 넘을 즈음 날이 저물었다. 단풍은커녕 사위를 분간하기도 힘들다. 중청대피소에서의 하룻밤. 평일 밤이어서인지 대피소를 찾은 등산객은 20여 명 정도였다.

본격 단풍시즌이면 정원 150명의 대피소는 만원이다. 편히 눕는 것이 아니라모로 누워서 ‘칼잠’을 자야 한다.

이튿날 새벽, 대청봉에 올랐다. 옅은 구름이 바람을 타고 산정을 넘는다. 이따금양양과 속초의 불빛, 오징어잡이배의 집어등이 보였다.

일출. 설명이 필요없는 장관이다. 오렌지빛 수평선으로 벌건 해가 둥실 떠올랐다. 발아래 공룡능선과울산바위가 볕을 받아 반짝인다.

눈이 아플 때까지 떠오른 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는 순간, 화들짝놀랐다. “이런! 단풍이다!” 대청, 중청, 소청봉에는 단풍이 들고 있었다.

아직 산 전체가 물든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북동쪽능선을 따라 군데군데 붉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약 두 달 간 온 천지를 태울 불씨이다. 등산객은 환호를 올린다. 사진을 찍고 난리가났다. 비록 단풍의 시작에 불과하지만, 힘든 산행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확인했다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다.

하산길은 천불동계곡. 백담계곡과 수렴동계곡이 우람하다면 천불동은 아기자기하다.아름다움이 정밀회로처럼 얽혀 있는 곳이다.

절벽 사이로 난 계곡이어서 등산로의 3분의 1이 철계단과 철다리이다. 풍광에 취해 계단을 헛디디면 크게다치기 쉽다. 천불동의 단풍도 봉정암과 비슷한 상황이다. 절벽을 타고 몇 그루만 붉어져 있다.

약 4시간. 산행의 끝은 행락인파의 소란스러움으로 알 수 있다. 마지막 다리를넘으면 비선대. 그 아래로는 차가 들어오는 평지이다.

설악동을 찾는 여행객 100명 중 99명은 비선대까지만 다녀간다. 그 위로는 오르지 않는다.단체로 여행을 왔는지 학생들이 왁자지껄하다.

비선대 바위 위에서 깔깔거리며 웃는다. 젊은 기운을 갖고도 왜 더 오르지 않는지. 턱까지 올라온 한마디를 그냥 삼켰다. “얘들아, 저 위에 단풍이 피고 있어.”

■설악 단풍 제대로 감상하려면

설악산은 동서남북으로 약 10여 개의 등산코스가 있다. 일정에 따라 다양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마음 속 깊은곳까지 붉게 물들이려면 내·외설악을 관통하는 정상정복 산행과 봉우리를 잇는 능선산행이 제격이다.

용대리-백담계곡-수렴동-봉정암-대청봉(1,708㎙)-희운각-천불동계곡-비선대를잇는 32.8㎞의 코스가 단풍 산행에 좋은 정상정복 코스.

쉬지 않고 주파하면 19시간이 걸린다. 1박 2일, 혹은 2박 3일 산행에 적당하다.반대 방향으로 넘는 방법도 있지만 천불동 계곡을 오르는 철계단과 희운각에서 소청봉에 오르는 격한 오르막 때문에 초반 체력 소모가 크다.

백담계곡에서시작하는 산행은 봉정암에 오르는 일명 ‘깔딱고개’를 제외하고는 난코스가 별로 없다.

이 코스 중천불동계곡이 설악 단풍의 으뜸 경관으로 꼽힌다. 비선대에서 희운각에 이르는 이 계곡에는 귀면암, 오련폭포, 천당폭포 등 설악비경의 열 손가락 안에꼽히는 명소가 줄줄이 늘어서 있다. 하얀 바위를 타고 내리는 옥색 물줄기와 그 위를 뒤덮은 오색의 단풍은 한 마디로 장관이다.

능선산행의 백미는희운각과 마등령을 연결하는 공룡능선. 오르락 내리락 5시간이 걸리는 힘든 산행이지만 하늘을 찌르는 기암 봉우리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색을 피워내는단풍 등 신비로운 체험이 기다린다.

아침 일찍 능선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희운각대피소 등에서 밤을 지내고 출발해야 한다. 길을 잘 아는 리더가없거나 악천후에는 절대 산행 불가.

충고를 듣지 않으면 실종되거나 실족하기 십상이다. 설악산 관리사무소 (033-636-7700,7702·강원속초시)

▦반나절 코스(시간은 편도)

권금성 코스=소공원-권금성(케이블카ㆍ30분), 비룡폭포 코스=소공원-육담폭-비룡폭(50분),금강굴 코스=소공원-비선대-금강굴(1시간 40분), 울산바위 코스=소공원-계조암-울산바위(2시간), 대승폭포 코스=장수대-대승폭포(50분), 백담사코스=용대리-백담사(2시간)

▦당일 코스

양폭 코스=소공원-비선대-양폭(3시간 10분), 수렴동 코스=용대리-백담사-수렴동대피소(4시간)

▦1박2일 코스

백담사 코스=소공원-비선대-마등령-오세암-백담사(10시간), 대청봉 코스=소공원-비선대-희운각-대청봉-오색(14시간)

권오현기자

■올 단풍 유난히 곱다?

단풍은 활엽수의잎 속에 있는 다양한 효소(색소)가 기온의 차이로 우열이 바뀌기 때문에 물든다.

기온이 떨어지면 잎자루와 줄기가 붙어있는 기부에 분리층이 생겨 잎에서 생성된 당(糖)이 줄기로 이동하는 길이 막힌다.

잎에 당의 함량이 늘면서 봄부터 여름까지 녹색을 내던 클로로필색소는 분해되고 붉은 색의안토시안색소, 황색을 내는 카로틴 또는 크산토필색소가 생합성된다. 잎은 자연스럽게 녹색을 잃으면서 붉은 색, 또는 황색으로 변해간다.

기온, 습도,자외선 등 외부 조건에 따라 다양한 효소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단풍의 색깔은 같은 수종이라 하더라도 다양하고, 해마다 그 질이 다를 수 있다.

단풍은 평지보다 산, 강수량이 많은 곳보다는 적은 곳, 음지보다는 양지, 기온의 일교차가 큰 곳에서 특히 아름답다.

사실 지난 몇년 간 단풍은 단풍이 아니었다. 물들지 않고 그냥 말라버렸다. 올해는 일교차가 컸고 강수량도 많지 않아 아름다운 단풍이 될 거라는 게 기상청의전망.

그러나 최근 산악지대의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전문 산악인 사이에는 ‘최악’이 될 것이란 예측도 나오고 있다. 날씨가 지나치게 차가워지면물이 채 들기도 전에 그대로 낙엽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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