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늦은 가을 군복무를 마치고 교직생활을 할 때다. 궁색했지만 꿈 많던 나의 젊은 시절, 한번도 가본 적이 없던 파리 센 강가의 어느 풍경을 그렸던 일이 있다. 얼마나 가보고 싶었던지 파리에 다녀오신 평론가 이일 교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피어난 그 정경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었다.그 무렵 서울 B 고교에서 함께 근무하셨던 당시 교감선생님이 어느 술좌석에서 나에게 한가지 부탁을 하셨다. 사는 집 벽이 너무 허전해 함 선생 그림 한 점을 걸어 놓을 수 없겠냐는 것이었다. 그림 값은 물론 ‘똑바로된 술 한 상’이었다.
고민에 빠진 것은 대책없이 ‘예’라고 대답한 뒤였다. 사실 당시 나의 작업은 추상회화에 심취되어 그분이 원하셨던 사실적인 화풍의 그림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포장 했던 그림이 20호 정도 되는 그 세느 강변의 상상화였고, 선물한 그림은 이후 그 댁 한쪽 벽면을 장식했다.
그 댁을 방문할 때면 자식을 만나는 것 같은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세월이 지나 나는 그 학교를 떠나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어왔고, 그 분은 교장선생님으로 퇴임하신 후 1995년께 유명을 달리하셨다. 그 그림도 내 기억에서 점차 사라졌다.
그런데 어느날 서울 청계천에서 서화사를 운영하는 한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 고물상이 과천 쪽에서 수거해 자기 가게로 가져온 어떤 그림의 서명이 함섭 화백의 것이어서, 이 그림의 작가가 맞는지 확인하려는 전화였다.
그림이 사장의 손에 들려서 화실로 들어온 순간, 나는 30여년 만에 상봉한 그 화폭 앞에서 벅차 오르는 감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거슬러, 참 어려웠던 그 시절이 눈물 방울에 담겨 소매 끝에 묻어 나왔다. 그림 속에 담긴 꿈 많던 청춘은 이제 흰머리 중년을 넘긴 나의 가슴에서,그림 위에 쌓인 먼지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털어 놓고 있었다.
자신의 뜻하지 않은 횡재를 확인한 사장께서는 내게 필요한 옛 물건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 보라고 하셨다. 한지화를 하는 작업의 특성상 고서를 많이 사용하는 나로서는 여간 고마운 말이 아니었다.
이후 내 작업실에는 한 트럭 분의옛 고서가 쌓였다. 그 고서는 내 평생 제작 할 수 있는 작품의 재료로 충분했다. 마치 외지에서 성공하고 돌아온 자식으로부터 한아름 선물 꾸러미를 받은 듯, 흐뭇한 마음은 젊은 시절 센 강가의 어느 풍경을 그렸던 그 추억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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