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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이슬람세계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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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이슬람세계 '생생'

입력
2001.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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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바투타 여행기-30년 걸친 10만km 여정1325년 6월 14일 모로코 명문사족의 아들 이븐 바투타가 성지 순례의 여정에 올랐다. 그때 이슬람문명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바투타는 30년 동안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의 3대륙 10만km를 여행했고, 당대 이슬람 미리니야조의 쑬퇀(술탄ㆍ군주)아부 아난의 특명을 받아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2년 뒤인 1356년 ‘여러 지방의 기사(奇事)와 여러 여로(旅路)의 이적(異蹟)을 목격한 자의보록(寶錄)’이라는 제목의 기록이 완성됐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로 더 잘 알려진 기록이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가 한국어로 완역됐다. 프랑스어본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완역된 것이다.

남파간첩 ‘깐수’로 알려진 정수일(66ㆍ전 단국대 초빙교수)씨가 옥중에서 번역한 작품이기도 하다.

때마침 21세기 세계의 중심 미국이 이슬람세력을향해 테러 참사의 보복전쟁을 선언했다.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이 은신한 나라 아프가니스탄이 신병 인도를 거부하고 대미 지하드(聖戰)를감행할 준비에 나선 긴박한 순간이다.

14세기 초 인도에 머물렀던 바투타도 인근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지하드에 참가했다. ‘알라는 남을돕는 자는 꼭 도와주신다’는 ‘꾸란(코란)’의 구절을 발견한 그는 뜨겁게 흥분하면서 배에 올랐다.

이 지하드의 한 장면을 바투타의 여행기에서 찾아볼수 있다. “날이 밝자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선단은 항진하고 석포를 쏘아댔다.

나는 쑬퇀 가까이에 서 있던 사람이 갑자기 날아든 돌에 맞는장면을 봤다. 선상에 있던 사람들은 방패와 칼을 들고 물속에 뛰어들었다…”

바투타가 걸어간 여행과 탐험의 길은 상상을 뛰어넘는 여정이었다. 그는 25년 간의 아시아 기행과2년 동안의 유럽여행을 거쳐, 3년 동안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사상 초유의 여행 뒤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기행은 그보다 앞선13세기 후반 ‘동방견문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의 23년 간의 여행과 비교된다.

그러나 청년 이븐 바투타가 거쳐간 방문지의 범위와 여정, 탐험정신은 단연 독보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바투타는 그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여행기에 옮겼다. 그래서 ‘이븐 바투타 여행기’는 이슬람 문명 전반과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제도를 생생하게 전달한 문화인류학적 사료로 꼽힌다.

그가 묘사한 ‘파루스의 등대’가 한 가지 귀중한 사례다. 파루스의 등대는 말로만 전해 들을 수 있었던세계 7대 불가사의.

바투타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맞닥뜨린 파루스의 등대는 한쪽 벽이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하늘 높이 솟은 방형 건물인 등대내부에는 방이 꽤 많았다.

등대의 문은 지상에 나 있었고 문앞에는 문높이의 건물이 한 채 있었다. 등대는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인 길쭉한 육지에세워져 있는 것이었다.

바투타가 만났던 파루스의 등대는 수백 년이 지난 뒤인 1994년 알렉산드리아 바닷가에서 잔해의 모양으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바투타가 특히 세심하게 묘사를 한 나라는 인도이다. 그는 10년 가까이 인도에 머물면서 인도 상류층의결혼 풍습과 델리의 현자(賢者) 관리들, 각종 매매행위와 교환관계 등 다양한 생활상을 겪을 수 있었다.

그가 만난 쑬퇀 아불 무자히드 무함마드샤는 겸손하면서도 잔인한 군주였다. 어떤 사람이 쑬퇀이 자신을 때린 일이 있다고 고소하자, 쑬퇀은 법관의 판결에 따라 피해자가 내리치는 몽둥이를 고스란히 맞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혹한 형벌 탓에 그의 문 앞에 시체가 없는 날이 드물었던 잔혹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쑬퇀이 이븐 바투타를 아끼고 사랑해서 바투타에게 자우자 읍 등 5개 도시를 주었다. 바투타는 인도에 머무는 동안 ‘작은 쑬퇀’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여정을 기록하는 바투타의 문체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다. 그는 여행 내내 이슬람 세계 각지의 종교계명사들과 접촉하고 예우를 받았다.

가는 곳마다 그를 대접한 귀족의 딸을 아내로 삼았고, 그 아내들을 남겨 두고 여행을 떠났다. 그는 결혼 과정을 별다른 감정을 섞지 않은 채 짧고 간결하게 서술한다.

그가 경험하는 죽음의 위기도 마찬가지다. 바투타는 심한 열병을 앓거나 격렬한 전투에 참가하는등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그는 그러나 숨가쁜 위기를 흥분에 휩싸이지 않고 차분하게 전달한다.

한편으로 바투타의 긴 여정 중 한국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아쉽다. 그는 짧은 기간 중국을 방문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역자 정수일씨는 아랍어의 원발음을 살리고 자세한 각주를 달아놓는 등 충실한 번역에 힘썼다. “이슬람의 문화적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역자는 전한다.

이븐 바투타는 이슬람 문화 속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독실한 무슬림(이슬람 교도)이었다. 세계의 지배세력이 이슬람 문명이었던 시기에 무슬림인 그가 처음 만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고 관대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그는 예수의 탄생지 베들레헴을 방문했다.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바투타가 방문한 베들레헴은 야자수 그루터기가 남아 있고 건물이 많았으며, 기독교도가 숭앙하는 곳이었다.

바투타는 낯선 기독교인을 ‘내객을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는 ‘예수’를 언급할 때 언제나 ‘그에게 평화를’이라는말을 덧붙였다.

그것은 아이러니가 돼버렸다. 기독교도가 세운 나라 미국이 700년 전 예수의 평화를 기원한 이슬람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됐으니 말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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