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일 힘이라도 남은 사람들은 모두 살던 곳을 떠나고 있다.”파키스탄으로의 탈출 길에 나섰다가 국경 봉쇄로 발길이 묶인 한 아프가니스탄 난민은 최근 영국 BBC방송에 보낸 편지에서 아프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이렇게 전했다.
20여년에 걸친 전쟁과 3년째 계속된 극심한 가뭄으로 이미 500만 여 명이 떠나간 아프간에서는 미국의 공격이 임박하면서 피란민의 행렬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라디오 등 바깥 소식을 접할 만한 수단이 전혀 없어 미국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미국의 공격을 받아야 하는지 조차 모른 채 무작정 유랑 길에 오르고 있다.
아프간 내에서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의 배급에 의존, 연명하고 있는 난민은 380만 여 명. 그러나 지난 주 탈레반 정부의 외국인 추방 명령으로 WFP와 비정부기구(NGO) 관계자들이 아프간을 떠나면서 난민들의 운명은 하루 앞도 점칠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됐다.
WFP 대변인은 “현재 아프간에 비축된 구호식량은 1만5,000톤 남짓으로, 2~3주면 바닥 난다”면서 “그나마 탈레반의 영공 봉쇄로 비행기를 이용한 식량수송 길이 막혀 대부분의 지역에서 배급이 끊긴 상태”라고 말했다.
최근 아프간을 떠난 한 구호요원은 “혹한기를 앞두고 10월까지 식량이 보충되지 않으면 진짜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더구나 구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산간오지에서는 나무와 풀 뿌리로 목숨 줄을 이어가고 있고, 다섯 살도 채 되기 전 숨지는 아이들이 3분의 1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공격움직임이 가시화한 이후 지난 주에만 2만5,000여명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탈출했고, 수만 명이 접경지대로 몰려들고 있다. 양국은 즉각 국경을 폐쇄했지만, 수비가 다소 허술한 산간지대를 통해 숨어드는 난민이 하루 3,000~4,000명에 달한다.
탈레반의 거점인 칸다하르는 인구의 절반인 10만여명, 수도 카불은 4분의 1이 빠져 나갔다. 미국의 공격이 본격화하고 작전이 장기화할 경우 수백만의 난민이 나라를 떠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근 파키스탄에 유입된 난민들은 대부분 여자와 어린이들로, 이는 탈레반 정부가 대미 성전(聖戰)에 대비해 남자들의 거주지 이동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BBC는 보도했다.
천신만고 끝에 난민촌에 발을 디딘 이들도 의식주를 겨우 해결하고는 있지만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조국의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 하루를 고통속에 보내고 있다. 난민 수가 갑작스레 늘면서 구호품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구호단체 옥스팸의 한 관계자는 “아프간인들에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 지 물으면 대부분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고 전하면서 앞날을 우려했다.
이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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