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척결을 위한 성전을 선포한 미국은 10년 전 그때도 이라크의 악마 후세인을 제거한다며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 1991년1월17일 걸프전이 터졌을 때, 기자는 베를린 특파원이었다.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가 상징한 냉전 종식과 90년 가을의 독일 통일 등 세기적변혁 드라마를 지켜본 직후였다.90년 여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래 개입 명분을 축적한 미국이 평화 대세 역전을 우려한 반전 여론을 존중할 리 없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은 당혹스러웠다. 전쟁으로 ‘신국제질서’를 이끈다는 논리를 납득할 수없었다.
어쨌든 전쟁터로 가야 했다. 목적지는 후세인이 보복 표적 삼을 이스라엘이었다. 테러 비상으로 항공편을 찾기 어려워 프랑크푸르트, 취리히를 거쳐 18일 새벽 겨우 아테네 공항까지 갔다. 통과여객 대기실에서 이라크 스커드 미사일이 막 수도 텔아비브를 때렸다는 뉴스를 들었다.
텔아비브 행 항공로는 진작 폐쇄된 상황이었다. 대기 승객은 모두 이스라엘인이었다. 전쟁이 나면 유학생도 귀국한다는 게 사실이었다. 막연히 기다리기를 8시간, 이스라엘 항공 여객기가 예고도 없이 왔다. 보안요원과 실랑이 끝에 전쟁터로 들어가는 행운을 잡았다.
프레스 센터가 있는 텔아비브 힐튼 호텔에 한국 기자는 혼자였다. 구면인 대만 연합보 기자는 이집트에서 대절 택시로 시나이 반도를 건넜다고 투덜댔다.
이스라엘은 독가스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후세인을 악마로 몰아간 선전공세 탓이었다. 이라크는 독가스 탄두를 장착할 기술이 없다는전문가 지적은 쓸모 없었다. 창문을 모두 비닐로 봉한 채 숨 죽인 도시는 적막했다. 기자들도 방독면을 지니고 다녀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간헐적으로 이어진 스커드 미사일과 패트리어트 요격미사일의 공방은 이라크를 초토화한 무차별 공습의 참상으로부터 세계의 관심을 분산시키기에 충분했다.
두 주일 동안 취재와 송고, 대피를 되풀이하느라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호텔 대피소에서 만나는 투숙객에는 노인과 어린이가 유난히 많았다. 공습에 갇힌 여행객으로 여겼으나,낮게 깔리는 독가스 위험을 피해 17층 호텔로 피신한 이들이었다.
전쟁에 익숙한 국민답게, 대피소에서도 힘찬 민요 합창이 울려 퍼지곤 했다. 그러나늘 근심어린 얼굴들이 있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말로만 듣던 그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은 후세인의 독가스 위협보다, 지난 악몽이 되살아 나는 것이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게 위선과 거짓이 난무한 전쟁의 유일한 진실이었다. 석유와 전략적 이해를 다툰 전쟁을 어떤 고상한 이념으로 포장하더라도, 유대노인들의 독가스 악몽을 되살린 죄악을 가릴 수는 없다. 훨씬 참혹한 이라크 양민 피해를 허황된 ‘신국제질서’ 논리로 덮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이스라엘에서도 반전 시위가 이어지는 판에 우리 언론은 미국의 신무기 소개에 골몰하는 것을 보면서, 자원하다시피한 전쟁 취재를 스스로 포기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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