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9월19일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주의가 이집트ㆍ수단 남부 나일 계곡의파쇼다에서 충돌했다. 이것이 이른바 파쇼다 사건이다.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식민주의의 줄기로 삼고 있던 프랑스군은 이 해 7월 파쇼다에 도착해 프랑스국기를 게양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밀고 나가며 그 해 9월 수단을 점령한 영국군의 키치너 장군은 103년 전 오늘 프랑스군의 지휘자마르샹 대령에게 파쇼다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마르샹은 이를 거절했고, 두 나라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나 양국은 외교적타협을 통해 모로코를 프랑스 세력 안에 두고 이집트를 영국 세력 안에 두기로 함으로써 전면전을 피했다.
파쇼다 사건이 외교적으로 수습됐다고 해서 유럽 열강들 사이의 긴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뒷날 레닌이 ‘독점 단계의 자본주의’라고 정의한 제국주의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열강들 사이의 국지적 분쟁들을 역사의 연표에 점점이 박으며 제국주의 전쟁으로서의 제1차세계대전을 예비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알제리와 마다가스카르를 연결하는 횡단정책을 밀어붙였고, 영국은 아프리카 종단정책에 인도를 연결해서 카이로, 케이프타운, 캘커타를 세력권의 꼭지점으로 삼은 3C정책을 폈으며, 독일은 베를린, 비잔티움(이스탄불), 바그다드를 잇는 3B정책으로 이에 맞섰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벨기에도 아프리카로 뛰어들었고, 태평양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에 의해 분할됐다. 후발 주자들은선발 주자들에 대해 원한이 많았다.
유럽 내부에서는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가 맞부딪치며 발칸 반도를 이글거리게 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부부가 1914년 6월28일에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지 않았더라도 전쟁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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