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나라 안팎이 아무리 소란해도 부모들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자녀교육. 중·고생 학부모들이 온통 입시에 노심초사하고 있다면,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가장 골치를 썩는 문제는 단연 컴퓨터게임 지도문제다.“순진하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작은 거짓말을 하고 저금통의 돈을 빼내가기도 하는 것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알고보니 게임때문이더군요. 컴퓨터게임이 아이의 인성마저 바꾸고 있어요.”
학부모 두 셋만 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화제지만 워낙 전범(前範)조차 없는 문제라, 다들 한 숨들만 내쉴 뿐 뾰족한 대책이 없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가정마다 컴퓨터게임을 둘러싼 ‘전쟁’들을 치르고 있다. /편집자주
지난 주 서울YWCA 산하 모 지역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있었던 ‘어머니 사이버 지킴이단’모임.
유해 사이버환경으로부터 자녀들을 지키는 활동을 하는 단원 20여명은 대부분 초ㆍ중학생을 둔 중산층 주부들이다. 이들 ‘보통 엄마’들의 얘기를 들어보았다.
▲ 최점순씨(46)
초등학교 5학년 아들녀석 때문에 걱정입니다. 2년 전 아이 아빠가 두뇌발달에 좋을 거라며 ‘바람의 나라’‘포트리스’게임 CD를 사준후로 애가 게임 외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어졌어요.
마우스를 한번 쥐면 놓으려 들질 않습니다. 매까지 들어가며 ‘하루에 1시간’규칙을 정했지만 도무지 소용이 없어요.
걸핏하면 “엄마. 오늘은 외출 안 해?”하며 눈치나 살핍니다. 거기다 게임하면서 음악까지 다운 받아 쿵짝쿵짝, 도무지 산만하고 불안해 보여서 ‘저렇게 놓아둬도 되나’하는 생각에 심란하기만 합니다.
저녁 때면 아빠에게 혼날까봐 “엄마, 오늘은 게임 안 한 걸로 해 줘.”하고 조르고…. 하여튼 매일매일 전쟁이 따로 없습니다.
▲ 최명자씨(50)
여자 애들도 똑같아요. ‘나의 신부’라는 게임 CD가 인기라며 초등학교 6학년 딸이 하도 조르길래 얼마 전에 사줬어요.
학원 다녀오기 무섭게 게임을 시작하고 또 저녁먹자 마자 쪼르르 컴퓨터로 달려가는 거예요. “공부는 언제 할래?”하고 소리치면 “소화가 돼야 공부가 된다”며 핑계를 대요.
이러다 늦은 밤까지 숙제가 밀리면 늦게 들어온 애 아빠가 “도대체 애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며 역정을 내요. 스트레스 받아서 집을나가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주로 악역을 맡는 제게 딸아이가 한번은 정색을 하고 “엄마 혹시 계모 아니야?”하고 묻는 거 있죠(웃음). 갈수록 게임수준도 높아져 더 빠질 것 같은데 걱정돼 미치겠어요.
▲ 이미경씨(38)
초등학교 5, 2학년 두 아들이 얼마 전까지는 ‘바람의 나라’ 무료사이트만 이용하게 했는데 “재미가 없다”며 유료사이트 이용시간을 적립해 달라고 생떼를 쓰는 거에요. 할 수 없이 3시간에 5,000원씩 내고 몇 번을 적립해 줬지요.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엔 졸라도 소용없다”고 다짐을 받지만 지켜지지 않아요. 큰 아이 생일이 며칠 앞이라 “생일선물로 뭘 받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사이트 이용시간을 적립해 달라는 거 있죠.
꼼짝없이 또 해주게 생겼어요. 게임 유료사이트가자꾸 생겨 아이들을 유혹하는데 이건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 김원숙씨
초등학교 5학년 아들 몸무게가 54kg이나 돼요. 한숨이 나올 정도지요. 집안에 비만체질이라곤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 탓인 것 같아요.
태권도 학원에 등록시켜도 빼먹는 날이 태반이고, 일부러 심부름을 시켜도 동생을 대신 보내고 자기는 게임을 해요.
특히 학교에서 무슨 기분나쁜 일이 있었다 싶은 날에는 인상을 쓰고 방에 틀어박혀서는 밥도 안 먹고 게임을 하죠.
‘조금만, 조금만 더….’ 아이에게 그 소리 듣는 게 요즘 제일 큰 스트레스랍니다. 다른 일에는 도무지 집중을 못하는 아이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눈에 불이 들어오고…. 이해가 안돼요.
▲ 최현숙씨(40)
성실하던 우리집 5학년짜리 아들도 게임에 빠져 요즘 도통 공부를 안 해요. “컴퓨터 할 시간이다.” 그러면 자다가도 벌떡일어나죠.
집에서 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차는지 요즘 PC방 출입도 부쩍 잦아졌어요. PC방에 가야만 디아블로 확장팩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PC방에 가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이번 주안에 확장팩을 사 주기로 약속을 했어요.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 임병남씨(40)
우리집에서도 초등학교 6, 2학년 두 아들이 컴퓨터를 차지하려 맨날 옥신각신 합니다. 서로 시간을 정해놓고 사용하는데 ‘10분전, 5분전’외쳐 가며 초재기까지 하는 모습이 가관도 아니에요. 시간을 넘기면 서로 치고 받고, 동생 녀석은 울고….
▲ 임병남씨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 내려놓기가 무섭게 컴퓨터를 켜길래 한 소리 했더니 “반 아이들 전부 ‘포트리스’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자기네들끼리 게임하면서 채팅하고 그러는 거죠. 다음날 학교에 가면 전날 게임 얘기로 떠드는데 게임을 안 하는 애들이야 여기에 끼지 못할 거 아니에요. 우리애가 왕따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무턱대고 게임을 막을 수도 없는 입장이에요.
▲ 최수경씨(가명)
아직 인터넷을 깔지 않았는데 우리 애도 요즘 대놓고 “왜 인터넷을 안 깔아줘서 왕따를 만드느냐.”고 항의를 해요.
▲ 김원숙씨
게임에서 쓰는 무기 있죠? 아이템인가, 뭔가 하는…. 요즘은 게임 잘해서 아이템 많이 갖고 있는 애들을 무슨 영웅처럼 받드나 봐요.
우리 아이도 집에 데려오는 친구들 태반이 게임 잘하는 친구들이에요. 서로 집에 초대하기 위해 싸움까지 한대나.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는 친구들은 이제 한물갔대요.
▲ 이미경씨
TV뉴스나 신문, 책 같은 데서 게임중독에 대한 기사가 실리면 애들을 꼭 부릅니다.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엄마, 우리도 병원가야 되는 거야?”하고 걱정되는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효과가 얼마못 가요. 그때 뿐이죠.
가끔씩은 애들이 TV를 보다 저를 부르기도 해요. “에이 엄마, 매일 2시간 정도는 문제없다는데.” 솔직히 저도 헷갈립니다. 어느 땐 한 반에 1/4 이상이 게임중독이라고 그랬다가 또 어느 땐 적당한 게임은 두뇌개발에 좋다고 그러고…. 어느 정도가 적당한 건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 장동미씨(33)
저는 큰 애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 평일에는 못하게 하고 주말에는 지칠 때까지 하게 합니다. 컴퓨터를 아이 방에 두지 않고 안방에 두는 게 아이의 절제심을 기르는데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집을 넓혀서 이사를 가면 거실에 둘 작정입니다.
▲ 최명자씨
저는 디아블로 게임 처음 나왔을 때 딸이랑 같이 배웠어요. 조카가 게임 CD를 깔아줬는데 솔직히 정말 끝내주더군요(웃음).
제일 잘했을 때 레벨 80까지 갔거든요. 게임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어른인 저도 자제가 안되더라구요. 밥할 시간 놓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니까.
CD가 망가진 것을 계기로 ‘에라, 이 참에 끊자’하고 관뒀는데 며칠 동안은 계속 화면이 떠올라요. 그러니 애들이야 오죽하겠어요?
▲ 임병남씨
게임하면서 채팅으로 주고받는 말이 온통 욕설인 것도 큰 문제입니다. 여기 이미경씨와는 바로 앞뒷집 사이인데 요전 날 저희 아이들과 이분 아이들 사이에 대판 싸움이 벌어졌어요.
‘바람의 나라’에서 채팅으로 대화하던 중 심한 욕을 했다는 게 발단이 됐죠. 욕지거리에, 어른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상한 게임용어에, 다른 애들도 그렇겠거니 하고 넘어가지만 보통 문제는 아닙니다.
▶ 아이의 게임중독 이상신호 (한국컴퓨터생활연구소)
- 숙제를 미루는 등 공부를 소홀히 한다 - 게임을 하느라 끼니를 거르고 잠을 설친다 - PC방 비용을 얻기 위해 참고서 등을 사겠다며 거짓말을 한다 - 게임 때문에 친구들과 놀지 않는다 - 게임 도중 말을 시키면 화를 낸다 - 게임을 그만하라고 나무라면 반발한다 - 게임 성적이 좋지 않으면 풀이 죽는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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