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재학중 소집영장을 받고 즉시 학보병으로 1년 6개월간 최전선에서 군복무를 마친 뒤 졸업하였다. 1960년 초에는 취직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랐다. GNP가 몹시 낮았던 시기였기에 직장이 적었기 때문이었다.나는 사학과출신이어서 고등학교 교사가 제격이었다. 마침 선배가 근무하던 여고에 이력서를 내고 인사권자와도 만나 면접을 했다. 나는 이 학교의 역사교사가 되어 소박하면서도 꿈 많은 정열을 품고 미래에 대한 설계까지 해놓았다.
하지만 개학이 임박했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선배와같이 인사권자를 만났다. 그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더니 딴 사람을 추천하게 됐다고 말했다.
나의 소박한 ‘청년 교사’의 꿈이 좌절된 이유는 ‘뒷거래’에 방심했다는 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낭패를 당한 나는 사회에서 무엇을 하기가 겁이 났고, 사람이 싫어졌다.
사회에 나오자 마자 멍이 든 셈이다. 충격을 안고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반드시 학자가 된다는 생각보다는 충격의 현장을 빠져 나오겠다는 피난본능이었다고나 할까.
당시 4ㆍ19혁명에 이어 5ㆍ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마침 병역기피ㆍ미필자가 공직에서 무더기로 정리되는 일이 생겼다. 어느날 대학원 강의가 끝났을 때 신석호 지도교수님이 연구실로 오라는 전갈이 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국사편찬위로 와서 촉탁으로 근무해보겠나?” 나는 더운 밥 찬밥 가릴 처지가 못되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곳에 취직을 했다. 신박사는 그 때 그 곳의 사무국장을 겸하고 계셨다. 5ㆍ16이후 보름 만에 전격 취직이 된 것이다. 그 직장 역시 병역 정리가 되어 여러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가친도 역사교수였으나 내가 그 뒤를 밟는다고 하자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그러나 국사편찬위에 근무하면서 나는 역사학에 더욱 매료되어, 나의 일생을 걸 수 있었다. 그 때 1개월 월급이 삼만환(현재 3,000원)이었으나 오히려 풍족하게 살았던 기억이 난다.
이후 정식 직원(편사직)이 되어 그곳에서만 11년간 있다가 ‘국적 있는 교육’이 제창되던 1972년 지금의 성신여대에 사학과가 창설되면서 옮겨왔다. 이곳에서도 벌써 30년째가 되고 이제 내년이면 정년을 맞게 된다.
그 때 그 교사 취직 건이 잘못되어 학문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것이니 ‘뒷거래’ 안 한 것이 오히려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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