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을래요?”이렇게 남자를 불러들인 여자는 냄비에 스프를막 뜯어 넣고 나서 남자에게 말한다. “자고 갈래요?” 남자는 여자와 ‘진짜’ 자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는 “좀 더 친해지면 해요.” 언제나 여자는 자기 식이다,
앞으로 여자는 또 그럴 것이다.자기 식대로 사랑하고, 자기 식대로 떠나고.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사랑이라 믿을 것이다. 그녀에겐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냥’ 사랑에 빠지듯, ‘그냥’ 헤어지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 있니?”라고 물었던 남자가 “변하니까 사랑”이라고 깨닫게 되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다. 속절없는 봄날이 그래서 아름다운 것처럼.
데뷔작이 은퇴작인 감독이 있는가하면,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감독이 있다.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로 데뷔한 허진호 감독이 그렇다. 그의데뷔작은 ‘일상에 천착한 멜로’ 라는 새로운 영화작법을 유행시켰다.
‘봄날은 간다’는 크레딧을 보지 않아도 감독의 이름을 맞출 수 있을 만큼 ‘허진호적’이다. 감독의 말투처럼 큰 파동이 없는줄거리, 치매에 걸린 할머니(백성희)와 혼자 컵라면을 먹으며 속앓이를 하는 아들에게 소주 한 병을 슬쩍 건네 주는 아버지(박인환) 등 온기가 느껴지는가족, 그리고 슬픔.
지방방송사의 아나운서 겸 PD인은수(이영애)와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는 소리 채집 여행을 갔다가 사랑에 빠진다. 이혼의 경험이 있는 은수는 “사귀는 사람 있으면 데려 오라”는 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상우가 부담스러웠다.
“우리 그만 만나자” “내가 잘 할게요” 두 사람의 대화가 겉돈다. 은수와 상우의 갈등은 연상의 이혼녀와 연하의 총각이라는 ‘스캔들성’ 사실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감독은 그렇게 보이게끔 영화를 만들었다.
‘소리’는 물체에 닿는 음파의 진동. 그 미세한움직임을 녹음기에 담는 상우에게 ‘사랑’ 역시 그렇게 채집이 가능한 것이었다. 모든 시간, 모든 공간의 소리가 다르듯,그녀와의 사랑은 ‘유일한’ 그것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를 밀쳐냈다 잡아당기기를 반복한다. 여자는 욕망과 사랑으로 구성된 자기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감정의 유희를 지속한다.
‘오 수정’의 수정처럼 은수는 끊임없이 남자를 애태우고 시험하지만 허진호 감독은 홍상수 감독처럼 드러내놓고 잔인하지는 못하다.
대신 그는 은수의 감정적 기복을 낮은 파동으로 드러내며, 이 파동을 감지하는 상우의 정신적 성숙 혹은 노화로 자연스런 결말을 유도한다.
“우리 같이 살까?” 또 다시 봄이 되어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은수에게그는 대답 대신 그녀가 선물로 준 화분을 다시 건네준다. 비로소 그는 알게 된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생의 마지막 날에 ‘봄날은 간다’를 불렀던 그 마음을. 갈대밭에 선그에게 들리는 소리가 갈대 같기도, 바닷소리 같기도, 바람 소리 같기도 한 그 까닭을.
‘맞춤’ 배우처럼 보이는 유지태와 이영애는 여태껏 한연기 중 최고라는 평을 들을 것 같다. 28일 개봉.
■허진호 감독-"감정표현엔 정답이 없습니다"
몇 달 전, ‘봄날은 간다’ 를 찍으면서 허진호(38)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기억으로 남은 그 때의 느낌이 더 정서적으로 다가온다.” “아버지 회갑 날, 조그만 중국 음식점에서 연분홍 치마를 입고 ‘봄날은 간다’를 부르던 어머니의기쁜 듯하면서도 슬픈 모습과 그 노래에 대한 기억.”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길가에 활짝 핀 노란 개나리.”
“작은 소리들로 영화가 재미있을 수 있다면.”
이런 것들로 그는 막연하게나마 ‘행복’에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야기를 만들면서 ‘행복’은‘연애’가 되고, ‘그 사랑이 변했을 때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이 어떤것들이 있을까’로 바뀌었다. “만나고 헤어지고 아파하고, 다시 만나지만 또 헤어지고 하는 그런 기억.
이 모든 게 운명적이라기보다 어느날 서로 사랑하게 되고, 갑자기 한 쪽이 ‘헤어지자’고 말하면서 갖게 되는 기쁨과 고통, 그런 것들을 담아보고싶었다.”
기억에는 생활에서 얻지 못하는 느낌이 있다. 기억의 감성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살면서 ‘이런 게 있구나’하는 느낌.
그것을 허진호 감독은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않은 거리에서 관찰한다. “주관화도, 객관화도 되지 않은 지점”이라고했다.
때문에 허진호 감독의 기억의 감성들은 영화에서는 과거가 아니라 현실이고, 사람들의 기억 속을 파고들어 ‘나의얘기’가 된다.
배우들조차 나의 기억이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그러지 않고는 유지태도 이영애도 상우나 은수가 될 수 없다.
연기자가 자기 감정을 가져가는 방식. 허준호 감독에게 ‘원칙’이란없다. 매 장면마다 10번 정도 반복했다.
그것도 같은 연기패턴과 대사가 아니라 매번 다르게. “결과에대한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다. 처음 은수가 상우에게 집에 가자고 하는 장면을 찍은 것을 보면 10가지 모두가 너무나 다르다.
그러나 어느 것도 이유가 된다. 인간의 감정표현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찾기보다는 사실적이면서 감성도 살아있는것을 선택했다.”
감정의 정답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그는 은수 쪽에 서고싶었다. 어떻게 이해할까 고민했다.
어쩌면 그녀는 ‘봄날은 간다’의 그 ‘변화’ 자체가 아닐까. 은수도 옛날 첫 사랑에서는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믿는 상우 같지 않았을까.
그러나 결혼하고 헤어지고, 그런 세월을 지나면서 변한 것은 아닐까. 불쌍하고 얄밉고 외롭고이기적인 여자.
허진호 감독은 처음 이영애를 만났을 때 고개를 옆으로 숙인 채 자신을 쳐다보는 돌출성을 보고 ‘여기서부터그녀를 조금씩 만들어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봄날은 간다’는 ‘8월의 크리스마스’와 닮아있다. 비슷한 인물 구도, 거리두기, 한 장면을길게 가며 그 속에 섬세한 감정 담기.
그도 처음에는 장면전환을 많이 해 보자, 400컷은 찍자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결과는 여전히 허진호식‘봄날은 간다’가 돼 나중에 ‘내 스타일’을 생각하게 됐다는허진호 감독.
“변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변한 것도 있다. 감정을 많이 드러냈다. 꼭 연애이야기 때문이 아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때와 나이가 다르고, 생각이 변했다는 증거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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