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시골에서 삼촌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다. 해방되기 얼마 전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군이 가미카제 특공대에 보낼 젊은학도들을 차출하던 시절 아버지가 뽑혔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온갖 감언이설에 꿈 많은 젊은 청년이야 우쭐할 수도 있었겠지만 뭔가 수상한걸 느낀 할아버지가 낫을 들고 학교로 쳐들어가 일본인 교장과 담판을 벌인 덕에 아버지가 목숨을 유지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목숨을 유지한 것은 아버지뿐 만이 아니다. 그 때 아버지가 일본군에 끌려갔으면 아마 십중팔구 나는이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뿐 아니라 내 동생들도 마찬가지이고 내 아들역시 이 세상사람이 되지 못했을것이다.
생명이란 참으로 우연한 것이다. 한 생명에서 다음 생명으로 이어지는 선은 더할 수없이 가늘지만 또질기기도 하다. 그 많은 우여곡절 끝에 나라는 생명이 태어났고 또 내 아들이 이세상에 왔다.
자연계에서 우리 인간을 제외하고 그 어느생물이 과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사고할수 있을까.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는 때로 “나는 도대체 무얼 위해이 땅에 태어난 것일까” 또는 “하느님은 과연 날더러 무슨 일을 하라고 보내셨을까” 등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산다.
부의 많고적음 또는사회적 지위의 높고낮음에 상관없이 나의 탄생은 무언가 의미있는 사건이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내죽음 역시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막연하게 기대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지난 주미국에서 벌어진 엄청난 테러 사건에서 사라진그 모든 사람들의 죽음이 제가끔 다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녔을까 생각해보면 허무하기 짝이없다. 자신의 죽음이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데 기여하리라는 착각 속에 비행기를 몰아 건물의 한복판으로 돌진한 자들의 죽음이 진정 어떤의미를 지니는지 알수 없으나, 무슨 운명의 고리에 얽혀 그비행기를 탔던 사람들이나 아침 일찍 세계무역센터로 출근하여 모닝커피를 즐기던 사람들의 죽음에는 또무슨 특별한 의미가있는 것인가.
진화생물학자인 나는 늘삶과 죽음을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생물이 탄생하는 것도 결국은 유전자가 더 많은 유전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계를 제작하는 과정이고, 우리가 그토록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는 죽음도 유전자가 더 이상 기계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폐기처분하는 과정에 지나지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유전자가 납치될 비행기에 탑승하도록 시키거나 평소에는 늦게 출근하던 사람을 그날 따라 일찍회사에 나가도록 등을 떠민 것은 아니다. 죽은이들의 몸 안에있던 유전자들도 그날 그렇게 운명이 그들의숨을 거둬갈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물이 유전자의 지시에따라 죽으라면 죽고살라면 사는 것은 아니다. 여러 유전자들이 모여 만든 생물체는 생명을 경외하며 죽음을 두려워하게끔 진화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동물도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없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개체가 오래 살아남아 번식을 제대로 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테러리스트들의 생명관은 어디서부터 잘못된것일까. 그들의 자살행위가 전혀 적응적이지 못한것은 아니다. 약자들의 입장에서는 한 두 사람의장렬한 죽음이 모두에게 엄청난 힘을 줄수 있다. 강자가 약자를 붙들고 동반자살을 기도하는 법은 없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죽은자기 동료들 몇몇을 애도하기는커녕 그 죽음으로 얻은 수많은 적의 목을 들고 거리로뛰쳐나왔다.
생물과 생물간의 관계는서로가 얻는 손익에 따라 크게 네가지로 나뉜다. 개미와 진딧물그리고 꽃과 벌사이처럼 양측이 모두이득을 얻는 관계를 상생 또는 공생이라 부른다.한 쪽은 손해를보는 대신 다른쪽에는 이익이 되는 관계로는 포식과 기생이있다.
남을 잡아먹고 사는 동물이나 남에게 빌붙어 사는 생물들이 만드는 관계들이다. 그리고 양측이 모두 피해를 입을수 있는 관계는 말할 나위 없이 경쟁이다. 그런가 하면 나도 손해를 보지만 남의 손해가 내것보다 크기만 하면 성립하는 관계를 악의(spite)라고 부르는데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자연계에서는 마땅한 예를 찾기 어렵다. 인간 사회에서는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생태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네 관계들 중경쟁과 포식 그리고 기생이 가장 흔하며 ‘성공적인’ 관계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의 연구로 이들 관계들에 못지 않게 수많은생물들이 상생의 지혜를 터득하여 성공을 거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 사회를 제외하곤 악의는 자연계의 그 어느 곳에도발을 붙이지 못한듯 싶다.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이번 테러는 명백한 악의였지만 악의를 악의로 갚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 자연은 절대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국정부가 악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상생의 길을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해본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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